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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샘 Nov 11. 2019

신분은 '도망자' 이름은 '이모'


 사춘기 소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달도 없는 캄캄한 저녁 할머니 댁에 심부름을 가는 길이었다. 밤하늘에 무수하게 빛나던 별들 중 어느 별똥별 하나가 아주 밝은 빛을 발산하며 지구로 날아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 소원을 빌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상해에 있는 예쁜 집에서 살고 싶어요.”

그날은 아마도 ‘민족과 운명’을 본 날이었을 것이다. ‘민족과 운명’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38선이 나뉘던 격변의 한반도에서 고향을 떠나 외국을 떠돌다 성공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애국한다는 주제의 대하드라마이다. 사춘기 소녀인 나는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외국에서 성공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상상을 했었다. 성공의 기준은 드라마에서 본 넓은 거실과 소파가 있는 집에서 사는 나의 모습이었다. 예쁜 집과 거실은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니 이해가 된다지만 ‘상해’라는 지명을 콕 집어 소원으로 입력한다는 것이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그날의 별똥별 소원은 15년 후 절반정도 이루어졌다. 상해의 대궐 같은 집에서 주인집 아기를 돌보는 가정부로 일하던 어느 날, 내 머릿속에 느닷없이 옛 그림 하나가 소환되고 별똥별 소원이 떠올랐다.

‘별똥별 소원이 이루어 진건가?’


살아있으나 이름도 신분도 자유도 허락되지 않은 나는 불법체류자였다.

97년, 북한을 탈북하고 중국으로 숨어들고, 한 사내에게서 딸을 낳았다. 

당시 북한과 가까운 동북 3성에는 탈북여성을 사고파는 불법이 성행했다. 중국 공안은 탈북자 색출 방법으로 탈북자 신고자에게 포상금을 내걸었다. 내 신분은 여전히 탈북자요, 중국 국적자가 아니니 ‘도망자’ ‘불법체류자’로 숨어 지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공안 자동차 경적소리만 들어도 파르르 떨리고 매일 밤 공안에 쫓기고 잡혀가는 악몽에 시달렸다. 10년 동안 나는 북경으로 상해로 도망 다니며 가정부로 살았다. 


그 시기 북경에는 한국기업들이 대거 중국으로 진출하고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부촌이 생겨났다. 돈 많은 한국 주부들이 말이 통하는 조선족을 가정부로 들인다는 소문이 시골 조선족 마을에까지 퍼졌다. 나는 지인의 소개로 운 좋게 한국인의 가정부로 고용되었다.

주인 부부는 서로를 ‘여보~!’라고 부르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들을 사장님, 사모님이라 부르며 극 존칭하는 모습이 생소하고 낯설었다. 가장 큰 충격은 뒤바뀐 개의 신분이었다. 집 밖에서 집을 지키는 동물, 주인이 먹고 남긴 것이나 변을 먹는 짐승이던 개가 이곳에서는 사람처럼, 아니 주인집 귀한 자식처럼 주인의 무릎에서 밥을 먹고 간식과 미용에 돈을 쓰고 있었다. 내가 살던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밥 한술을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는데 사람과 짐승의 처지가 뒤바뀐 이 부조리한 세상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가정부가 하는 일은 밥, 청소, 빨래, 아이 돌보는 일까지 집안일 전부였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그림이 있다. 주인 사모가 소파에 앉아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고 중학생 정도의 아들과 딸이 엄마 옆에 붙어 과자를 먹다 흘린다. ‘아줌마, 여기 좀 닦아줘요.’ 주인의 상냥한 명령에 나는 그들이 앉은 소파 다리 사이를 기어서 과자 부스러기를 닦아냈다. 가정부 일이 어디 그것뿐이랴. 주인은 사장님, 사모님, 사춘기 딸의 생리 팬티까지 속옷은 무조건 손으로 빨아 다려놓으라고 지시했다. 아줌마를 찾던 사장이 나를 보더니 ‘아줌마라 부르기 너무 젊잖아, 미쓰리라고 부르자, 미쓰 리.’ 하며 선심 쓰듯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그곳에서 이름도 존재하지 않았다. 26살, 내 이름은 ‘이모’ 아니면 ‘아줌마’였다.


그 시기 내 손을 잡아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꼭 예수를 믿어야 한다며 교회로 끌고 갔다. 처음 교회에 간 날은 거지같은 내 운명을 한탄하며 허억허억 울었다. 탈북하고 처음으로 아이처럼 울었다. 그날 이후로 힘든 일이 있으면 교회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불렀다. 하나님은 주인집 소파 바닥을 닦는 가정부를 ‘내 딸’이라고 불러주었다. 불법체류자, 도망자 신세인 나에게 ‘하늘나라 내 백성’이라는 신분을 주셨다.

10년 동안,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터널을 걷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나의 위로가 되고 쉴 곳이 되었다. 나의 영혼이 그 속에서 안식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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