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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샘 Nov 11. 2019

나라 버린 '배신자'

 

깊고 어두운 감방엔 작은 쇠창살 창이 나 있고 창살 사이로 벌 한마리가 자유롭게 유영했다. 나는 그 미물의 자유가 부러워 서럽게 울었다.


탈북하고 2년 후, 99년 초봄이었다. 그날은 시어른들의 성화에 떠밀려 처음으로 짠지장사(중국의 조선족 반찬으로 김치, 도라지무침 등 절인 밑반찬)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당시 나는 공안의 감시에 맘 졸이고 중국어가 서툴러 불안한데다 장사는 말만 들어도 벌렁거리는 나약한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돈에 팔린 여자는 1푼어치의 자유도, 1%의 결정권도 주장할 수 없었다. 짠지수레를 끌고 나선 내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장으로 들어가는 어귀 어디쯤에 짠지수레를 세우고 우물쭈물 눈치를 살피다가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허공에다 소리를 내 보았다. 

‘买咸菜.(반찬 사세요.)’

장사치들이 제멋대로 지르는 ‘사구려’처럼 큰소리로 질러보고 싶었지만 소리는 입안에서만 맴돌 뿐 터져 나오지 않았다. 

첫 마수거리도 못하고 불안한 눈망울로 주변을 살피던 그때 마치 첩보영화의 한 장면처럼 빨간 승용차가 다가와 멈추더니 남자 3명이 내 손을 낚아채 차에 밀어 넣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양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시멘트 바닥에 던져졌다. 누군가가 포상금을 노리고 탈북자를 공안에 신고했다고 들었다. 그날 시아버지가 공안 뒷주머니에 3,000원을 찔러주고 풀려났다. 수갑을 풀어주던 공안이 이렇게 경고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 동네에 나타나지 말라. 다시 돌아오면 그땐 죽는다. 아무도 모르는 남쪽 지방으로 도망가라.”

그리고 다시 2년 후, 한국 가서 돈 벌어야 된다는 시어른들의 완강한 고집에 여권을 만들려다 다시 공안에 붙잡혔다. 처음에는 3,000원에 풀려났지만 두 번째는 어림도 없었다. 

철컹 철커덕, 사람 키 세배는 넘어 보이는 대문을 지나고 3개의 철문을 더 지나 독방에 밀쳐졌다. 쇠문 잠기는 소리가 등 뒤에서 아치럽게 울렸다. ‘오늘도 몇 시간 후면 풀려날거야. 꼭 그렇게 될 거야.’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스스로 되뇌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나를 가둔 철문은 열리지 않았다. 

두 평이나 될까. 거적데기 같은 이불 하나와 변기로 쓸 플라스틱 들통 하나가 전부인 독방은 어둡고 습했다. 출입문 아래 바닥에 뚫린 쪽문으로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불결해 보이는 음식이 들어왔다. 천장 바로 아래쪽 귀퉁이엔 손바닥 만 한 창문이 나 있었다. 그곳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 빛이 저물면 감방은 내내 어두웠다. 먼지가 잔뜩 낀 쇠창살 사이로 말벌 한 마리가 자유롭게 드나들며 노닐었다. 나에게는 그 작은 버러지만큼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컴컴한 방안에 눈이 익어갈 즈음, 시멘트 벽면에 휘갈겨진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애기가 태어난 지 3일 만에 잡혀왔다. 우리 아기 젖 먹여야 돼요, 살려주세요.’ ‘나를 신고한 놈 끝까지 복수하겠다.’ ‘고향에 계신 엄마 보고 싶다.’ 낙서는 모두 나처럼 중국에 숨어살다 잡힌 조선 사람의 것이었다. 나도 그 옆에 낙서를 남겼다.

‘골짜기가 깊을수록 산이 높다.’

스스로 무너지지 않겠다는 몸부림이었고 고생한 만큼 좋은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나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그 글을 보는, 그곳에 갇힌 불쌍한 조선 사람에게 전하고 푼 희망의 메시지였다. 

어두운 감방 안의 시간은 하루가 1년처럼 느리게 흘렀다. ‘이 감방을 벗어날 날이 나에게 올까? 언젠가 오늘을 추억할 날이 있기는 할까.’

내가 갇힌 옆방에 가끔 조선말을 쓰는 여자와 남자가 들어왔다. 그들은 한주를 넘기지 않고 모두 북한으로 넘겨졌다. 하지만 나만은 무슨 이유에선지 조사할 것이 남았다며 내어놓지 않았다. 나는 살려달라고 기도하다가 엉엉 울고, 미친년처럼 철문을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다가 고꾸라져 잠이 들었다. 

일주일에 딱 1시간, 변기통을 비우고 햇볕을 쬘 자유가 허락되었다. 콘크리트 벽에 달력을 그려놓고 매일 날짜를 세던 희망을 포기하고 버러지 같은 목숨 살든지 죽든지 될 대로 되라며 넋을 놓기도 했다. 그곳에서 1,920시간, 80일 동안 고양이 세수는커녕 생리대도 없이 문명에서 버려진 인간이 며칠 만에 짐승이 되는지 관찰했다. 

집 근처 하늘 공원에서 찍은 사진. 녹이 쓴 자물쇠를 보면 깊은 감방안 마지막 자물쇠가 철커덩 하고 잠기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80일째 되는 날, 나는 북한으로 넘겨졌다. 

감방이 바뀌면서 죄명도 달라졌다. 남의나라(중국)에서는 ‘불법체류자’였다면 ‘내 것’이라고 여겼던 조선에서는 나라 버린 ‘배신자'가 되었다. 나 스스로는 조국을 버린 적이 없는데, 내가 버린 것인지 아니면 버려진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북한쪽 감방에 수감되었다. 

북한 땅을 밟는 순간 내 마음은 ‘죄인’이라는 두려움보다 꿈에서라도 안겨보고 싶었던 고향을 만지고 안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한껏 취해 있었다. 나라를 '버린 자'가 얼마나 고향을 안아보고 싶었는지 버려져보지 않은 자가 알기나 할까? 

북한 감방은 몸을 반으로 접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무쪽문을 열고 들어갔다. 1평정도 되는 좁은 공간에 머리를 푼 여자 둘이 앉아있었다. 그들 역시 중국에 살다가 잡혀온 여성들이었다. 다른 방에 수감된 죄수들은 우리를 ‘도강 꾼’이라 비하하면서도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감추지 않았다. ‘거기는 진자 이팝(흰쌀밥)만 먹소? 쏘세지(소시지)도 배부르게 먹어봤소?’

창살로 된 복도에는 죄수를 감시하는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죄수들 중에서도 나처럼 중국에서 잡혀온 여성을 함부로 대했다. “나라 버린 배신자, 변절자, 더러운 것들, 되놈에게 몸 던지고 그 종자 낳아 키우다가 왜 기어들어왔어. 중국 놈들이 조선 남자보다 잘해주디? 너 같은 년 키워준 조국에 부끄럽지도 않니. 니들 먹이는 쌀이 아깝다...” 아직 20도 안 돼 보이는 앳된 경비병의 폭언과 무례함에 눈 한번 치켜떴다가 그가 던진 장작이 볼에 날아와 꽂혀 피가 흐르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20일 후 같은 방에 있던 도강 꾼 세 명이 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새벽 2시, 보위부 직원이 우리를 허름한 여관방에 밀어 넣으며 아침 7시까지 자라고 명령했다. 눈치를 보니 그들이 출입문 앞에서 우리를 감시할 작정이었다. 

‘지금 여기서 도망치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나는 옆에 누운 여인들에게 기회를 보다가 도망치자고 제안했다. 셋은 그러자고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10분도 되지 않아 모두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떴을 때 옆에 누운 여자 둘은 물론 문지기들도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 여인들을 조용히 흔들었으나 깨어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혼자라도 탈출하자. 나는 숨을 죽이고 출입문 쪽으로 걸어와 신발을 신었다. 바로 앞에서 문지기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한쪽을 신고 다른 한쪽 발을 끼는 순간 “어디가.” 코를 골던 사내가 나를 쏘아보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문 옆에 기대어 자던 다른 새내도 깨어 내 눈을 쏘아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변소 갑니다.” 

나는 숨 막히게 긴박한 순간 ‘화장실’이 아닌 ‘변소’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들의 처분을 기다렸다. 최대한 비굴하게 보이기 위해 눈을 깔고 엉덩이를 들썩 거리며 급한 시늉을 했다. 한참 나를 쏘아보던 사내가 “빨리 갔다 와.”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화장실을 지나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부터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큰 도로가 나오고 공공건물로 보이는 곳을 지나고 마을길도 지났다. 한참을 달려 넓은 시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압록강이었다.


사진 찍으러 다니다가 우연히 렌즈에 담긴 사진이다. 창살에 갖힌 빛이 어쩌면 깊은 감방 같아 슬프다.

2001년 11월 23일 새벽이었다. 백두산이 지척인 그 지역은 벌써 몇 번의 눈이 오고 강기슭은 이미 얼어붙어 있었다. 압록강이 이렇게 넓었었나? 눈앞에 펼쳐진 시커먼 강물이 4년 전 혜산에서 건넜던 압록강의 10배보다 넓게 느껴지고 두려움에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앞에 서기까지 최소 100일은 감방에 갇혀 있었다. 마지막 20일(조선감방)은 쌀알을 거의 구경도 못했다. ‘이 하마같이 무서운 강을 살아서 건널 수 있을까?’

강둑에 주저앉아 한참 망설이던 나는 바닥 쪽으로 내려가 보기로 결심하고 일어섰다.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는 길목에 둥그런 무덤처럼 보이는 그림자를 지나치며 저게 무얼까 궁금하던 순간 무덤 안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꼼짝 말고 서라.”

무덤이 아니라 국경경비대 초소였다. 그 긴 강둑에서 하필이면 국경 경비대초소 앞으로 지나가다니, 이제 더 이상 뒤로 돌아설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뒤로 뛰는 순간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잡히면 엄청난 매를 맞게 될 것이다. 

“서라 잡히면 죽는다. 야, 빨리 배 끌고 와.” 

바로 뒤에서 경비대원들이 황급하게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리고 시커먼 그림자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좀 전까지 하마같이 두렵던 강물 쪽으로 죽을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발바닥이 흙길에서 얼음판으로 바뀌고 10미터쯤 빙판 위에서 미끄러지다가 풍덩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뒤에서 쫓는 소리가 두 개 세 개 늘어나고 호루라기 소리, 배를 찾는 소리가 점점 멀리에서 들렸다.

허리춤까지 오던 강물이 이내 정수리를 지났다. 내가 이날을 위해 수영을 배웠을까, 물살을 가르면서도 뭍에서 들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를 쫓던 그림자가 물에 뛰어들지는 못하고 뭍에서 발을 구르고 배 가 지러 간 그림자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강물과 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는 중학교 때 수영을 배워 물에서 살아남는 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오랜 감방생활에 허약해진 몸은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아래로 떠밀려갔다. 하는 수 없이 바닥이 얼마나 깊은지 자맥질을 시도했다. 바닥이 발에 닿으면 걸어서 갈 요량이었다. 하지만 지쳐버린 몸은 바닥에 닿지 못하고 튕겨 올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 그곳은 수력발전소 물을 모아둔 댐이었다.

앞뒤를 살펴보니 강의 절반쯤이었다. 팔다리가 축 늘어져 움직일 힘이 없고 정신도 몽롱해져 갔다. ‘사람이 이렇게 죽는 거구나.’ 떠밀려가는 저 먼 곳에 두 나라를 연결하는 철교가 불빛에 아른거렸다.

“살려주세요. 나 살려주신다 했잖아요. 살려주세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고 눈 뜰 기운도 없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알 수 없는 기운에 떠밀려 다행히 강기슭에 닿았다. ‘알 수 없는 기운’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힘은 내 것이 아닌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표현할 단어가 이것밖에 없는 것이 아쉽다.

강기슭이 가까워지니 손으로 안을만한 크기의 돌이 손에 잡혔다. 나는 물살에 떠밀린 몸을 멈추기 위해 돌을 부여잡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기운 없는 손에 돌덩이가 미끄러지듯 사라지고 그렇게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돌 하나를 움켜잡고 멈추었다. 그리고 물 밖으로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순간 물을 잔뜩 먹은 가죽옷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강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서고 또 주저앉기를 몇 번의 시도 끝에 단단히 서서 걸을 수 있었다.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이번에는 쌩쌩 매서운 칼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얼굴이 찢어질듯 아프고 얼어붙은 가죽옷과 바지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마치 칼에 베인 살 속에 소금을 마구뿌리는 것 같은 고통이 시작됐다. 

‘강을 건넜더니 추위에 죽겠구나. 살려주세요. 살려주신다 했잖아요.’ 나는 다시 울며 기도했다.

한참을 걸어 마을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모두 깊은 잠을 자는지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예민한 동네 개들이 스산하게 짖어대는 마을 어귀를 벗어날 때까지 불 켜진 집은 보이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추위에 몸이 오그라들 때쯤 어느 집 창문에 불이 들어왔다. 나는 그 집 대문을 향해 무작정 돌진했다.

“救命(살려주세요.).”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몇 장면이 기억날 뿐이었다. 누군가 달려 나와 나를 방에 뉘었다. 그가 언 몸을 녹이려면 술을 마셔야 한다며 입을 벌려 술을 부으려 했다. ‘술 못 먹어요.’ 내가 손 사례를 치자 이번에는 뜨거운 물을 밀어 넣었다.

정신이 든 것은 아침 10시쯤이었다. 아주머니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밥을 내놓으며 말했다.

“너는 참 천운이다.”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남편이 있으면 넌 절대 우리 집에 들어오지 못했을 거야. 남편이 탈북자를 돕다가 크게 벌금을 낸 후로는 탈북자를 집에 들이지 않거든. 근데 그가 지난밤 멀리 출장을 갔다. 그리고 나는 저녁에 누우면 아침이 될 때까지 한 번도 깨본 적이 없다. 근데 오늘 새벽에 무슨 영문인지 잠에서 깼어. 화장실 다녀오고 다시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더라. 그래서 불을 켜자마자 네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네가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이 천운이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가 놀란 눈으로 말을 받았다. “그래? 나도 예수 믿는다. 하나님이 너를 살리라고 내 잠을 깨웠구나.”

나는 아주머니가 다니는 처소교회에서 차비를 얻으며 꼭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그가 내 말을 막으며 말했다. “은혜는 하나님께 갚고 지금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걸어라. 길에서 공안이 너를 붙잡고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물으면 절대로 나를 떠올리지 말라.”

나는 아주머니의 말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딸이 있는 곳으로... 탈북자를 모르는 남쪽으로 깊이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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