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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샘 Nov 11. 2019

탈북 처자 몸값이 3000원

3000원에 팔려간 날 밤 보름 달이 떴다.  차가운 달빛아래서  돈 몇천원에 팔려가는 내운명을 한탄하며 많이도 울었다.

탈북 처자 몸값이 3000


다시 압록강을 넘었다. 장사하러 왔다는 중년의 사내가 우리를 도시에 있는 식당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며 검은 손을 내밀었다. 식당일을 하면 한 달에 300원, 3개월만 일하고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900원이면 쌀이 얼마야~’ 석 달만 고생하면 엄마 아버지 쌀밥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내를 따라나섰다.

깊은 밤, 사내는 국경경비대가 득실거리는 곳에서 여럿이 같이 움직이면 위험하다며 나와 동생을 갈라 세웠다. 당시 중국 국경지역에는 굶주린 조선 사람들이 강을 건너와 곳간을 털고 빨래도 훔쳐간다는 소문이 흉흉했다. 중국 쪽 국경경비대에 비상이 걸리고 변방지역에 사는 청년들도 야간순찰을 돌며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사내는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내일 저녁이면 큰 도시에서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며 안심시켰다.

한치 앞에 당도한 이별을 직감했을까.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았다.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눈물이 새어나왔다. 동생이 삐어져 나오는 두려움을 목구멍으로 누르며 말했다.

“울지 마, 울면서 헤어지면 다신 만나지 못한대. 울지 마, 울지 말라니깐.”

동생과 헤어지고 1시간도 안 되어 나는 국경경비대에 잡히고 말았다. 돈을 벌게 해준다고, 내일이면 동생과 만나게 해준다고 큰소리치던 검은 사내는 국경경비대 검문에 걸려들자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을 가버렸다. 그날 동생과 눈물의 이별을 하고 10년 동안 나는 동생을 만나지 못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물을 곳도 없었다. 그날의 기억이 너무 아파서 나는 지금도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 만남을 주저하곤 한다.


세 번째로 죽기 살기로 강을 넘어섰다. 그때부터는 나 혼자였다. 

새벽 어스름에 강을 건너고 젖은 몸으로 남의 집 굴뚝을 부여잡고 떨다가 다행히 말이 통하는 조선족 집으로 흘러들었다. 집주인이 다짜고짜 시집을 가겠냐고 물었다. 몸과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 지쳐있어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가 조선족 남자에게 나를 팔았다. 사람을 사고판다는 이야기는 중학교 세계역사시간에 배운 남의나라 옛 선조들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지, 내 이야기가 될 줄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하기야, 누군들 이 엄청난 일이 내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탈북처녀인 내 몸값은 3000원이었다. 처음 보는 사내가 내 손을 잡으며 멋쩍게 웃었다.

내가 팔려가던 날은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는 날이라고 했다. TV에서는 홍콩이 100년의 영국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환호했다. 자유와 해방을 기뻐하는 화려한 폭죽이 요란하게 터지고 중국인들이 술잔을 부딪치며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바로 그날, 아이러니하게도 내 몸은 일면식 없는 한 사내의 것이 되었다. 모질고 질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 탈북처녀의 목숨 값 3,000원은 부로커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깊은 밤, 팔려가 갇힌 창문 밖에는 허연 보름달이 나무에 걸려 있었다.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지금 저 달을 보고 있을까, 사라진 자식의 이 거지같은 운명을 엄마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밤 나는 ‘엄마, 아부지~’ 부르며 서럽게 울고 울었다.


나는 슬픈 영화를 보지 않는다. 기구하게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제멋대로 기억 속을 파 헤집어 두려움, 공포, 섦은 눈물 같은 것들을 마구 건져 올리는 것이 싫어서이다. 나는 탈북자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보지 못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곧 나의 삶이었고 내 몸에 아직 그날의 흔적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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