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의 눈에 비친 '아이러니 남한'
지금이야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지만 자본주의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충격은 아주 컸다.
22년 전쯤이었다. 북경의 부자동네에서 한국인의 가정부로 일을 시작하던 나의 눈에 이상하고 요상한 것이 목격되었다. 부자사람들이 개(강아지)를 마치 자식을 품에 안 듯 안고 다니면서 동화에 나오는 개구리가 된 왕자이야기처럼 짐승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어린 자녀에게 할 법한 행동을 개에게 하고 있었다.
그(강아지)는 미용 숍에서 목욕하고 관리 받고 병원에서 검진을 받으며 음식은 과자처럼 백화점에서 사서 먹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처럼 옷을 입고 전용 장난감과 간식도 있으며 주인의 침대에서 잠을 잔다.
내가 살던 고향에서 개는 ‘집 지키는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개)는 우리 식구(사람이)가 먹고 남긴 것을 먹으며 잠은 밖에 있는 개굴에서 잔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꼬리를 흔들거나 사납게 짓는 것으로 자기 역할에 충실하며 그 보상으로 가족의 귀여움을 받는다.
근데 이건 뭐지? 사람인 내가 주인이 먹고 남긴 음식을 먹고 창고 방에서 잠을 자고 주인의 눈치와 비위를 맞추고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까지도 해야 한다. 이런 행동은 우리 집 똥개가 맡은 역할인데 이곳에서는 내가 그 짓을 하고 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썩어빠진 자본주의’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구나.
그 후로 나는 오래 동안 개를 싫어했다.
한국에 오니 부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강아지를 반려자로, 친구로 함께 살아가는 모습에 서서히 익숙해져갔다.
지난여름이었다. 한강 산책길에 시원한 강바람을 쐬고 싶어 좋은 자리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 옆을 보니 서너 걸음쯤에 한 여인이 돗자리 위에 앉았고 유모차도 있었다.
“아이구, 예뻐라~ 그랬쩌요~~”
아기의 옹알이를 받아주는 여인의 평화로운 모습이 노을빛에 반사되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싱긋 웃음이 지어졌다.
기분 좋은 웃음이 굳어버린 건 집에 가려고 일어선 순간이었다. 일어서 보니 앉아 있을 땐 보이지 않던 아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아기는 털 복숭이 강아지였다. 순간 좀 전까지의 평화로웠던 분위기가 와장창 깨져버렸다. 헛웃음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생각이 많아졌다. 반려동물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사람의 자리에 앉은 동물이, 아니, 사람의 자리에 짐승을 앉힌 사람이 나는 아직 편하지 않다.
‘반려’와 ‘친구’자리에 사람이(도) 있었으면 더 좋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