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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자룡 Apr 12. 2020

비움

도대체 비운다는 것이 범인들에게 가능은 한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비움은 나와 가족과 나를 아는 사람들과의 활력과 행복을 의미한다.

나는 내가 어떤 불가능을 이루어 가려할 때 나는 생각이란 걸 해본다  불가능을 이루어본 기억은 몇 개 안되지만, 그렇더라도 이루어 냈다고 하면 그건 이미 불가능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불가능을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다. 작금의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으로 거의 모두가 불편함과 두려움을 안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비움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편한 마음은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현재 대처에 정말 훌륭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멕시코에서 오랜 기간을 살아왔던 나에게 국가나 그 국가를 정말 튼튼하게 지탱하고 있는 우리 국민의 높은 의식에 정말이지 이런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어온 나라임에도, 옛날엔 정해진 신분으로 인해, 때론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때론 공평하지 못함으로 인해 서로의 이해관계가 모두 충족되지 않음에도 위기 극복이라는 하나의 목표가 생기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힘을 발휘해 가는 우리나라는 범상하지 않은 나라임에 틀림없다.


이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해 보려 한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다. 천주교 신자로서 비움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신자로서의 내가 바라보는 비움은 채움과 바로 직결된다. 나를 비워내고 온전한 믿음으로 채워야 한다는 종교적 의미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거기까지 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저 비움 자체를 이야기하려 한다. 내가 생각하는 비움은 나와 가족과 나를 아는 사람들과의 생의 활력과 행복을 의미한다. 나는 그 어떤 철학적(이런 말은 너무 어렵다. ^^) 자세나 입장에서도, 비움이 활력과 밝음과 행복이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움이 그저 조용한 방에 앉아서 눈감고, 비워지지도 않는 마음을 비웠다고 착각하며, 혼자서만 기쁨을 느낀다고 하면 의미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난 그리 크게 의미를 가지고 싶진 않다  비움도 밝음과 연결되어야 하고, 행복과 미소와 웃음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나는 그게 올바른 비움이라고 전제하고 글을 이어가려 한다.


온전하게 비워낼 수만 있다면 불가능은 이루어질 수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걸 이루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면, 나는 묻는다. "이 불가능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수 없이 많은 횟수로 질문을 반복하더라도 나에게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같았다. 비움. 내가 온전하게 비워낼 수만 있다면 그 불가능은 이루어진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온전하게 비워낼 수만 있다면 불가능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곤 나는 생각한다. 도대체 온전하게 비워낸다는 것이 나와 같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능은 한 것인가? 이 역시 불가능하다면 불가능을 이루어 내기는 어렵다. 불가능하다. 비움 자체가 불가능하니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이게 무슨 나답지 않은 말장난이냐?


기업에서 오랫동안 실무를 해왔던 사람, 오로지 장사를 함에 있어 숫자로 적힌 실적만이 눈에 박히던, 눈에 보이게 움직이지 않으면 실적은 없다는 극히 현실주의자인 내가 갑자기 비움을 이야기하려 하니 말이 뱅뱅 돈다. 그렇더라도 꿋꿋하게... 이런 경험들은 다 있다. 어떤 일을 지속해가면서 왜 이렇게 안되나 정말 짜증 나게 이렇게나 안되나. 하는 일이 있다. 그걸 지속하다가 이젠 도저히 안 되겠네. 그래 될 대로 돼라 하고 침대에 자빠졌는데, 어라 됐네. 뭐지? 하는 경험 말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집어넣고 이제 포기다 하는 마음으로 하나 툭 던져 봤는데, 면접 보러 오세요라고 전화를 받고는 최종 합격했을 때가 있다. 반면에 이번에 꼭 되어야 할 텐데, 느낌도 좋다 하면 거의 대부분이 안된다. 그리곤 내가 기대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머릿속에 콱 박힌다. 우리나라 축구는 내가 보면 꼭 진다. 그러니 내가 안 봐야 한다. 주식도 내가 사면 떨어진다. 복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 보니 의식적으로 기대를 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데 기대하면 확률 100%로 안될 것 같고, 기대를 안 하면 이루어지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아도 되니 기대하지 않는 편이 속 편하다. 아무리 기대 안 하려 해도, 일말의 기대는 마음속에 슬그머니 자리 잡는다. 그리곤 안되면, 그럼 그렇지 내가 되겠어한다. 이런 경험들 다 있을 것이라는 고 나는 거의 확신한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많다. 기대했던 거 이루어진 경우의 수는 50여 년 인생에도 손가락이 남는다. 비움은 딱 이제 될 대로 돼라. 나는 이제 나 할 거 다 했다는 그 순간, 안 돼도 그만, 돼도 그만이라는 바로 그 순간의 마음가짐, 그게 비움이라고,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느낌으로 알 수 있는 비움이라고 나는 생각된다. 그 순간의 느낌을 일상에서 지속될 수 있다고 하면, 불가능을 이룰 수 있다. 될지 안될지에는 신경 1도 안 쓰는 그런 경지에서는 불가능을 이룰 수 있다. 그 순간을 지속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책들이 써지고 많은 방법들이 나오고 하는 것 같다. 지속할 수 있다. 아니 있을 것 같다. 이 역시 나의 착각 일 수 있으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커진다. 실제로는 기대가 적어져서 그런 것인지는 나도 잘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아주 조금은 비움의 느낌을 알 것만 같다. 그리고 난 지금 전에 없이 마음이 강해진다.


그렇게 젊음은 흘러가게 두면 된다. 그 자체가 비움이다.


그렇다면 소위 나이적으로 (강조, 실제 숫자 나이로 말이다. 마음으로 보면 나는 여전히 20대 후반이다. 우리 집사람 만나기 이전 나이로는 가고 싶지 않다. ^^) 어린 사람들은 비운다는 걸 느끼는 게 가능은 한 걸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만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정말이지 타고난 행운을 가진 사람이다. 나 역시 우리 아이들 앉혀 놓고, 비움이 어쩌고 저쩌고 하진 않는다. 최근 나의 목표는 아이들과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다. 오락실에서 동전 넣어가면서 겔로그를 해대던 게임 일 세대의 자존심을 가지고, 현재의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으나, 워낙 딸린다. 나 역시 숫자적 그 나이 때는 그런 걸 느끼지 못했다. 느낄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싶다. 숫자 나이로 '젊음'은 그 자체로 모든 게 이야기가 된다. 젊음은 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젊음 그 자체로 밝고, 웃고, 행복하고, 아프다. 그렇게 젊음은 흘러가게 두면 된다. 그 자체가 비움이다.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징징대지 않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무튼 결과가 좋던 안 좋던 내가 이걸 이루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는가? 답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답이 예스라면 그게 비움일까? 나는 그렇다. 어려운 이야길 정말 어렵게 한 것 같다. 이 역시 내가 아직도 징징대고 있는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은지, 아직도 젊다는 이야기다. 젊음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으나, 여전히 젊음에 나를 달아 맨다. 마음으로만 아무리 젊다고 외친 들 내가 젊어지진 않는다. 그걸 너무나 잘 아는 나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가장 젊을 오늘을 부여잡고, To-do list 1번을 호기롭게 하나 지운다. 아내가 앞에서 커피 마시면서 웃는다. 행복하다.


1. 브런치에 글 하나 올릴 것 - 오늘은 올려야 함. 얼마간 못 올려서 오늘은 최우선으로 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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