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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우비 May 29. 2024

불과 물이 만들어 낸 조화

아름다움 속 잔혹함, 개인과 집단 그리고 차별 <엘리멘탈>


아름다움의 실존, 사유의 간접화



 자본주의 아래,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아름다움은 우리네 뇌리에 선명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남자와 여자를 떠나, 미인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면 사람마다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교차하는 부분이 더 많을 것이다. 이를 두고 과거부터 이미 진행된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다비드와 아프로디테의 조각상과 같이, 그 시대의 미를 상징하는 사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과거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바라는 이상향이었으며, 신의 모습이었다. 즉,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해당한다. 하지만 최근에 아름다움을 거론할 때, 신을 언급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연예인과 배우가 되었으며, 최근에는 유튜버와 같은 인터넷 방송인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아름다움을 닮기 위해 성형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을 신화에서 인간에게로 옮기는 것에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아름다움을 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되었고, 더 많은 사람이 손을 들어준 쪽이 주류가 되는 방식으로 정착됐다. 아름다움은 자본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는 사람의 외적인 아름다움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모든 문화적인 부분에서 이런 방식을 띄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이제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곁에 있다. 하나가 수면 위로 올라, 다수에게 선택받으면 그와 유사한 것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다수가 같은 것을 선망하고 선호함에 아름다움은 다양한 것이 아닌 일관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일관적인 아름다움은 직면해야 하는 것들을 대중에게서 격리했다.




 직면해야 하는 것들이 사라짐에, 대중은 사유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가 접하는 미디어는 자극적인 것들을 더 중점으로 다루고 있으며, 대중은 깊은 소비보다 순간적이고 빠른 일회성 소비를 더 선호한다. 최근 모바일인덱스가 발표한 통계에서 유튜브 쇼츠와 틱톡과 같은 짧은 영상의 이용자 수가 일간 3,794만 명에 달한다는 점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 사유의 필요성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전처럼 직접 대중의 눈에 사유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아름다움 속에 잔혹함을 넣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사유를 끌어내고자 시도한다. 신카이 마코토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들 작품 내면에 어두운 부분이 있다는 점도 쉬이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에 차이가 있지만, 공통으로 자연과 재해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사용된 도구가 애니메이션이다. 그리고 이들과 같이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애니메이션을 이용하는 회사가 있다. 바로 픽사가 그곳이다. 픽사의 많은 작품이 여러 가지 사유할 것들을 조명하지만, 본 글에서는 <엘리멘탈>을 중점으로 이 사회를 바라보고자 한다.




 <엘리멘탈>은 미국 픽사의 작품이지만, 작품 감독인 피터 손은 재미교포 2세이다. 그래서 작품에는 한국이 가진 집단주의적인 모습과 미국이 가진 개인주의적인 모습이 모두 드러난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모두 드러난다는 점에서 지금의 한국을 조명할 수 있다. 다수의 기성세대는 집단주의적 성향으로 대표되며, 신세대는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대표된다. 반대되는 두 성향이 작품에 짙게 드러나 있으며, 그를 표현하는 방식은 앞서 이야기한 현대에 맞는 그것이다.


 



 


아메리칸드림의 닮은 꼴, 서울 상경



 <엘리멘탈>은 시작과 함께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져준다. 작은 배와 간단한 짐을 가진 버니와 신더. 그들을 잠시 조명하고 이어 빛으로 감싸여 황홀한 느낌을 주는 “엘리멘탈 시티”가 보여진다. 이 장면에서 지난날, 포디즘의 탄생과 함께 많은 이가 미국으로 꿈을 안고 이주하던 모습이 오버랩된다. 많은 미디어가 지금까지도 이의 긍정적인 모습을 부각해 보여주었으며, 이 영향으로 지금 세대도 미국이라는 나라에 환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모습이었으며, 그 속은 몹시 어둡다고 할 수 있다. 경제 수준 격차에 따라 자국에서는 엘리트였던 이가 단순 노동자가 되는 일이나, 인종차별 그리고 아메리칸드림을 선망해 이민을 위해 빚을 지는 등의 일들이 그러하다. 조지 칼린은 아메리칸드림을 “꿈속에서나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평했다. 이러한 모습을 한국에서도 쉬이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청년이 서울에 꿈을 갖는다. 높은 대학 진학률을 비롯한 여러 사회 현상이 접목된 결과다. 모두가 서울이면 그래도 갈만한 기업이 한 곳 정도는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영화 속 버니와 신더, 그리고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고 미국으로 향한 그 시대의 청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서울로 상경한 이들은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들이 처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을 맞이한다. 지방 4년제를 나온 이들은 서울에서 중소기업 생산직으로 가거나, 꿈을 품고 아르바이트로 버틴다. 그들이 꿈꾼 양질의 일자리는 기존 서울에 있었던 이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버니와 신더는 엘리멘탈 시티에 들어와 이민 수속을 밟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언어로 이름을 말했으나,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갈 때, 미국인이 이름을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미국식 이름을 만든다. 이러한 행위는 새로운 곳으로 터전의 이동이 단지 장소의 이동만으로 끝나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름은 개인을 나타내는 정체성이며, 이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기존의 나와 이곳에서의 나를 분리하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이름은 그곳의 주류 언어를 따른다는 점에서 눈여겨봐야 한다. 언어는 단순한 글자와 음성 체계가 아니다. 그 안에는 역사와 문화가 깔려있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는 인간의 생애에 영향을 미치며, 자아를 형성케 한다. 즉, 언어는 자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민으로 새로운 자아와 함께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기존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이름은 바뀌지 않으니, 겉으로는 자아가 유지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울로 상경한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 중 다수가 서울에 상경한 이후 방언을 고치고자 한다. 즉, 서울과 지방 간의 경제 격차로 나타난 힘의 차이가 언어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미국에서와 같이 기존 자아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수속이 끝난 버니와 신더는 거주지를 찾아보지만, 가진 것 없는 그들에게 엘리멘탈 시티는 가혹하다. 버니와 신더는 몸이 불로 이뤄졌다. 엘리멘탈 시티는 단지 그 이유로 그들을 배척한다. 도시를 지나는 기차 안에서 진동으로 물 원소 승객의 몸에서 물이 떨어진다. 떨어진 물이 신더에게 닿자, 몸을 구성하는 불이 무너진다. 버니는 급하게 몸을 복구할 원료를 신더에게 준다. 이 과정에서 물 원소 승객은 자기 몸에서 떨어진 물로 일어난 일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물 원소가 기득권을 차지한 상류층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에 비해 이제 막 이주한 불 원소는 약소하며, 현실의 빈민층에 해당한다. 해당 장면 이후, 버니와 신더가 임대 팻말이 붙은 집을 여러 곳 방문했으나 구할 수 없었다. 끝내 그들은 다 무너져 가는 폐허를 보수해 자리 잡는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에 해당하는 장면이지만, 한국에서는 다르게 볼 수 있다. 원래 서울에 자리 잡고 있던 세력과 지방에서 상경한 신규 세력의 구도다. 지방에서 막 상경한 이가 서울에서 적당한 집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들이 다다르는 곳은 고시원이나 반지하, 혹은 옥탑방과 같이 열악한 곳이다. 지금까지 비슷해 보였던 아메리칸드림과 서울 상경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영화 속 버니와 신더가 도착한 엘리멘탈 시티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미 과포화 상태이며, 개인이 자수성가하기 힘든 사회가 됐다.




 그리고 작중에서 나오는 “비비스테리아”가 있다. 작중에서 어떤 환경에서든 피어나는 꽃으로 소개된다. 앰버가 유년 시절에 관람하려 했지만, 제지당해 보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서 엘리멘탈 시티의 민낯을 볼 수 있다. 기존 기득권은 이주민인 불 원소를 사회적으로 차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기득권에 의해 발생하는 억압은 우리가 사는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자가에 사는 이가 임대에 사는 이를 차별한다. 그렇게 사회적 약자인 이들이 배려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억압받는다.




 불 원소가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외곽에서 지내는 것은, 진정 그들이 바라서일까. 지나가는 시민이 던진 “파이어 타운으로 돌아가.” 이 대사가 현실을 대변한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곳도 다르지 않다. 기존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차지한 이권을 위해 새로운 이들을 배척한다. 사람이 모이는 회사는 물론이거니와, 취미생활을 위해 모인 동아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비스테리아는 모두에게 허락되었지만, 그것을 볼 권리는 기득권이 정한다. 성공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한 이들과 서울로 상경한 청년들. 그들 모두가 성공이라는 꿈을 꿨다. 하지만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자신이 바라던 꿈과 성공에 도전할 수 있었던 이들은 몇이나 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현대에 들어 아메리칸드림은 사그라들었으나, 서울 상경으로 인한 과포화는 누그러들지 않고 진행 중이다. 언뜻 보면, 한국 청년층이 현실을 모르고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탄생했다. 이러한 부분도 <엘리멘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버니와 신더가 엘리멘탈 시티로 오기 위해, 파이어 랜드를 등지던 때가 그러하다. 자연재해로 무너진 고향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버니는 고향을 등지고 나온다. 이때 버니는 그의 아버지에게 전통을 따라 절을 했으나, 그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물론, 떠나지 않고 고향을 재건하는 방향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재건한다고 한들 반복되는 자연재해 앞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엘리멘탈>에서 파이어랜드는 안정성을 잃은 지방의 현주소와 같은 곳이며, 청년이 떠날 수밖에 없는 장소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청년층의 모습이다. 사회구조는 이미 한계에 가깝고, 인구는 자연 소멸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다. 지방의 기업은 서울로 이전했고, 그로 인해 지방에는 양질의 일자리가 없다. 가정을 꾸리는 것조차, 지방에서는 힘들다는 인식이 만연한 사회다. 정부에서 여러 정책을 내놓는 중이나, 그것들이 언제 효과를 나타낼지 장담할 수 없다. 그렇게 내몰린 청년들이, 생존이라는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한다. 그런 그들의 모습과 고향을 등지는 버니. 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집단과 개인, 기대의 부담



 엘리멘탈 시티로 이주한 후, 버니와 신더는 노력 끝에 “파이어 플레이스”라는 가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가 자리 잡은 폐촌은 어느새 “파이어 타운”으로 불린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앰버는 가게를 도우며 언젠가 물려받을 날을 기다리며 가게 일을 돕는다. 버니는 앰버에게 “이 가게는 우리 가족의 꿈이야. 언젠가 네가 물려받게 될 거란다.”라고 말했다. 앰버도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가게는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곳은 아니다. 장사와 무례한 손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그러나 버니는 특히, 물 원소에 더 과한 반응을 보인다. 불과 물의 관계로만 본다면 당연한 듯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넘어가선 안 된다. 버니의 모습은 우리에게 던져진 중요한 물음이다. 불과 물을 이념 혹은 인종으로 치환해서 보자. 이념이 다르고 인종이 다른 것이 증오를 품을 이유가 되는가? 사회가 다변화했다. 국내에도 다양한 인종이 거주하고 있고, 그러면서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교육이 진행됐다. 하지만 정작 배움과 같이, 정말 그 차이를 인정하고 있는가를 묻는 부분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버니의 모습을 그대로 학습하는 앰버가 있다.




 시간은 흘러, 버니는 은퇴를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됐다. 그리고 앰버는 사회활동을 시작할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버니는 아직 앰버에게 가게를 물려줄 생각이 없다. 작중에서는 앰버가 자기 조절이 미숙하기 때문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앰버가 왜 자기 조절이 미숙한가에 집중해야 한다. 버니가 앰버에게 고객 응대를 맡겼을 때, 앰버는 한 손님과 다툰다. 경험이 쌓인 버니에게는 대응하기 쉬운 것이지만, 초심자인 앰버에게는 어렵기만 하다. 버니는 그걸 해낼 때 가게를 물려받을 때라며, 앰버를 다독인다. 다시 몇 년이 지났지만, 앰버는 응대라는 부분에서는 아직도 미숙하다. 버니는 응대를 제외하고는 잘하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북돋는다. 앰버는 “맞아요, 해낼 거예요. 아빠가 쉬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한다. 그리고 배달을 가려고 물건을 챙기는 앰버에게 신더는 외조모의 유언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임종 때, 앰버에게 “불과 결혼해.”라는 말을 남겼다. 신더는 앰버에게 유지대로 짝을 찾으라고 한다.




 불이 상징하는 가치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부모에게 효도하며, 가정을 중시한다. 그리고 선대의 유지를 중요시하며, 그것을 후대에 전승하는 것. 이는 전형적인 집단주의의 모습이다. 버니는 앰버에게 스스로 진로를 탐색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앰버의 눈에 비친 버니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고생하는 모습으로만 비친다. 그리고 그 고생을 자기가 이어받음으로써 버니를 노동에서 해방해 주고자 한다. 이러한 모습은 80~90년대 한국 가족의 자화상이다. 개인의 발전과 행복으로 실현되는 자아실현보다는 가족의 안정을 더 중요시하는 당시의 가치관이 가감 없이 그려졌다. 짝을 찾으라는 신더도 그 기준을 앰버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존 세대의 기준을 요구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에 직면한다. 앰버가 자기 조절이 미숙한 것이, 정말 아직 익숙하지 않고 미흡하기 때문일까? 이에 대한 답을, 작품은 물 원소인 웨이드와의 만남을 통해서 말한다.


 


 “파이어 플레이스”의 주요 행사인 “레드 닷 세일”의 날. 수많은 인파의 몰림으로 앰버는 지하에서 올라온 열을 방출한다. 그 영향으로 수로가 터지며, 지하는 물에 잠기게 된다. 그 흐름을 타고 온 이가 웨이드다. 그는 등장과 함께 실직을 걱정하며, “파이어 플레이스”의 위법적인 것들을 확인한다. 다만, 실직 걱정과 함께, 그는 자기 흐름에 맞는 일을 찾기 힘들다고 넋두리한다. 가족이 운영하는 것을 받아, 운영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는 앰버와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는 웨이드. 작중 처음으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대조된다.




 이러한 부분은 후반에 더욱 부각된다. 앰버는 웨이드가 한 보고에서 비롯된 폐업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그의 상사, 게일을 찾아간다. 에어볼(야구 혹은 축구와 같은 스포츠)을 관람하는 그를 찾아가, 해결 방안을 문의한다. 그 과정에서 게일과 앰버는 충돌한다. 게일에게 에어볼을 관람하는 시간은 업무 외 시간인 개인 시간에 해당한다. 게일은 스포츠 관람이, 앰버는 가게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둘의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이며, 더 나아가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을 때 벌어지는 일을 보여준다. 개인과 개인의 충돌로 그려지지만, 그 이면에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고가 어떻게 극명하게 다르게 나타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게일이 보내고 있는 개인 시간은 개인주의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시간이다. 앰버에게 닥친 문제는 그에게 업무 시간에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앰버는 집단주의로서 개인의 시간보다 집단이 처한 상황의 해결이 더 중점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둘은 계속해서 충돌한다. 현재 기득권 세대는 애사심을 요구하지만, 신세대는 이를 거부한다. 과거에는 회사일이 가족일과 동일선상에서 바라봐졌다. 그래서 주말에 상사와 등산이나 낚시를 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신세대에서는 그런 일들을 일체 부정한다. 회사와 가족은 동일선상에 둘 수 없는 것이며, 이는 노동 시간으로 구분된다.




 극악으로 치닫던 분위기는 웨이드로 인해 바뀐다. 그는 앰버와 게일이 극단으로 치닫는 걸 막아냈으며, 게일에게 파이어 타운의 누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어필했다. 이로써 앰버가 바라는 기회를 가져온다. 웨이드와 앰버는 누수 발생 지점을 찾아, 보수에 성공한다. 이 과정 중에 웨이드는 자신이 가진 한 가지 일에 정착하지 못하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앰버는 “불의 언어에 이런 말이 있어. ‘디쇽’. 영원한 빛은 없으니 빛날 때 만끽하라는 뜻이야.”라며, 웨이드에게 알려준다. 이 단어의 의미는 지극히 개인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앰버는 집단주의적인 성향을 보인다. 이는 거대한 복선이다. 어떤 형태의 작품이든, 뜬금없이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앰버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치다.




 가족 생각만 가득하던 앰버가 웨이드를 만나며 변화한다. 자기에게 솔직한 웨이드에게 앰버가 점점 영향을 받는다. 웨이드와의 시간은 그에게 가족을 잊고, 그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지금껏 스스로도 모르게 쌓인 것들이 해소되자, 앰버가 고객을 대하는 것에도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변화의 절정은 앰버가 웨이드의 가족을 만나면서 시작한다. 저녁 식사 중 깨진 유리 물병을 자기 스타일대로 새로 만들어내자, 모두에게 칭찬받는다. 그러면서 새로운 도시의 건물은 유리로 지어진다며, 그 재능을 펼치라는 조언과 유리 회사에 인턴직을 제안한다. 하지만 앰버에게 내적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갈등을 직접적인 대사로, 스스로 인정한다. “나 솔직히 가게 물려받기 싫은 거 같아, 됐어?” 그러며 자신이 뭘 하고 싶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음을 말한다. 그 이유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며, 부모의 큰 희생에 보답하는 것은 똑같이 자신의 인생도 희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는 지금까지 앰버가 부모의 희생과 그에 수반된 기대에 자신을 죽여왔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리고 앞서 앰버와 관련해 남긴 물음에 대한 답이다. 스스로를 가뒀는데, 어떻게 완전할 수 있을까. 앰버가 겪는 자기 조절의 미흡함은 자아실현이 막힌 상황과 부모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도 이를 당연시 여겼다. 각종 매체에서 묘사되길 부모, 그리고 그 이전부터 모두가 그랬으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변화가 생겼다. 언론에서 MZ라고 명명한 세대는 이를 전적으로 부정했다. 기득권은 MZ를 문제 세대라고 한다. 기존 사회를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나쁜 것인가. 기존을 고수하는 것만이 방법인가. 가족과 전통을 유지하는 것보다 개인의 자아를 우선시하는 게, 정말 비난받아야 할 것일까?


“불 출입 금지라는 건 남이 정한 거잖아. 왜 남이 정한 대로 살아야 해?”
웨이드 리폴, <엘리멘탈 中>


 웨이드가 앰버에게 “비비스테리아”를 보여주기 위해 수로를 통과하기 직전에 한 말이다. 그리고 앞선 질문에 답이다. 우리는 근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공동체를 이루고 발전해 온 과거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제자리걸음만 할 것이었다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학술적인 이론과 개인의 자기 계발은 왜 필요했는가. 웨이드가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웨이드 이전 세대의 시티는 위험 요소인 불을 배제함으로 기능과 안정을 보장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가 들어섬에 바뀌어 간다. 웨이드와 데이트하는 앰버를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웨이드의 상사 게일은, 앰버를 위해 비비스테리아를 볼 수 있도록 공기 방울을 만들어줬다. 앰버가 비비스테리아를 보는 행위는 배제의 시대가 끝나고 협동과 화합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둘이 손을 맞잡는 장면이 이어서 나오는 것으로 불과 물이 반목하는 시대가 종료됨을 선언한다.




 작품은 이렇지만,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한국은 현재 변화의 격동기에 있다. 작품에서는 끝난 갈등이 현실에서는 아직 진행 중이다. 많은 이들이 개인주의로 향하는 와중에, 아직 집단주의를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둘은 격하게 부딪히고 있으며, 사회는 그 충돌의 여파로 변화해 간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충돌만 있다면, 결국 도달하게 될 곳은 버니와 신더가 도착했던 그 시점의 엘리멘탈 시티다. 우리는 웨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화합과 협동을 통한 조화를 이룰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희생 위에 쌓인 변화



 영화의 끝, 앰버가 물을 막기 위해 만든 유리 벽이 깨지며 홍수가 발생한다. 앰버는 파이어 타운에 대피를 선언하면서도, 버니와 신더가 파이어 랜드에서 가져온 푸른 불꽃을 지키기 위해 물이 차오르는 가게로 들어간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둘은 좁은 방에 갇힌다. 점점 좁아지는 와중에 앰버는 웨이드의 희생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상황이 끝난 후에야 앰버는 버니에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때, 사라졌다고 여긴 웨이드는 수증기로 기화된 상태였다. 이를 알아채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낸 앰버의 말과 버니의 인정으로 기체 상태에서 액체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여러 원소가 서로 반목하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보여주고 영화는 마무리된다. 심지어 버니와 신더는 웨이드의 가족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까지 한다.


이 마지막 장면은 한계에 대한 토로다. 웨이드의 희생이 없었다면, 버니와 신더를 포함한 불 원소는 여전히 물 원소와 반목했을 터다. 이는 현실에서도 같다. 지금까지 사회가 변화했던 때를 떠올려 보라.




 70년대 노동환경의 변화에는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있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다르지 않다. 18년도에는 윤창호법이, 22년에는 정인이법이 그러했고 23년인 지금은 구하라법이 의논되고 있다. 이렇듯 지금에 와서도 시대에 맞지 않는 법이 개정될 때도 시작은 여전히 누군가의 죽음이다. 법은 사회가 변화하고 가장 마지막에 따라가서, 그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법이 고쳐지는 시발점은 지금과 같아서는 안 될 것이다. 웨이드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부딪혔음을, 그리고 끝내 차별을 끊어내고 이뤄낸 화합을 기억하라. 웨이드의 희생은 평온해 보이는 현실의 이면, 차별을 끊어내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딛어야만 하는 현실의 한계와 변화의 필요성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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