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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10. 2022

192. 봄눈, 그리고 백석

3월, 봄이 오는가 싶더니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찾아와 다시 한 번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습니다. 강원도에 사는 한 시인은 이른 아침 하얗게 눈이 쌓인 사진을 보내면서 피었던 꽃망울이 모두 졌을 거라며 애잔한 슬픔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밤새 펑펑 내리는 눈을 생각하자니,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시며 눈이 푹푹 쌓이는 밤에 흰 당나귀를 타고 사랑하는 여인과 시골로 가고 싶어 했던 시인 백석이 생각납니다. 가난한 시인이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내린다고 했던 시인, 그리고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라고 읖조리던 그 마음도 헤아려 봅니다. 강원도 산골에는 ‘흰 눈이 푹푹’ 내리고, 시인의 말처럼 오늘밤엔 저 멀리에서 흰 당나귀가 ‘응앙 응앙’ 우는 소리도 들릴 것 같습니다.     

나는 가만히 창문을 열고 저 멀리 흰 당나귀를 타고 달빛 속으로 사라지는 한 쌍의 연인을 떠올립니다.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이어서 그렇게도 아름다운 시가 탄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잠시 해 봅니다.     

시인 백석이 사랑했던 여인 중 한명은 백석의 친구와 결혼을 했다지요. 그리고 만난 또 다른 여인이 바로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 여인입니다. 함흥에 있던 영흥고보 영어교사로 근무하던 백석은 동료의 송별회에서 기생이던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녀에게 ‘자야’라는 애칭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지자 백석의 부모는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으려고 서둘러 결혼시켰고 슬픔에 빠진 자야는 고향인 한성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러자 백석은 학교를 그만두고 한성으로 내려와 그녀에게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그때 지은 시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입니다. 백석은 결국 혼자 떠나게 되고 한국전쟁 이후 북쪽에 머물게 되면서 영영 두 사람은 이별하게 됩니다.     

백석이 사랑했던 여인이 몇 명 있었다 하니 이 시가 꼭 자야를 생각하며 썼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자야는 죽는 날까지 백석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품은 채 평생을 살아갔다고 합니다.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경영하던 자야는 죽기 일 년 전에 당시 1000억 원 대에 달하는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선뜻 시주합니다. 그 큰 재산을 시주하고도 아깝지 않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이 재산은 백석의 시 한줄 만도 못하다”고 말했다지요.     

자야가 시주했던 대원각은 현재 ‘길상사’라는 절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따금 그 절에 들르게 되면 경내를 돌며 시인의 사랑과 흰 눈, 그리고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떠올리곤 하는데 그곳 정원에 앉아 처연하게 혼자 소주잔을 기울였을 백석을 생각하면 조금 슬퍼지기도 합니다.     

그 옛날의 백석처럼 오늘도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소주를 마시면서 흰 눈이 푹푹 내리는 날 흰 당나귀를 타고 멀리 떠나는 상상을 하겠지요. 봄이 오는 길목에서 밤새 내린 흰 눈의 기별, 그 기별 속에서 사랑을 잃고 시를 썼던 백석의 마음을 떠올리며 책꽂이에 오래 꽂아두었던 해묵은 시집을 꺼내 가만가만 되뇌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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