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의 ‘가슴 아프게’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어릴 때부터 즐겨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지금도 옛날 트로트나 80~90년대 노래 대부분은 가사를 외우고 있는데 어떤 노래는 2절까지도 문제없습니다. 울고 웃는 일상에서 노래가사가 주는 의미는 특별할 수밖에요.
그런데 가사를 외우는 그 많은 노래들 가운데서도 유독 남진의 노래 ‘가슴 아프게’ 만은 성인이 되어서야 가사의 뜻을 깨우쳤습니다.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가사에서 ‘라면’을 ‘먹는 라면’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인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어김없이 바다와 육지와 라면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어느 순간 그것이 라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황당함이란 지금 생각해도 실실 웃음이 납니다.
스무 살 때부터 즐겨 부르다가 바로 얼마 전에야 깨닫게 된 노래가사도 있습니다. 이문세의 ‘휘파람’이라는 노래인데 ‘그대는 나의 어린애’라는 가사를 항상 ‘그대여 나에게 어리네’라고 불렀습니다. 얼마 전 출근준비를 하다가 문득 그것이 ‘어린애’라는 것을 깨닫고는 혼자서 한참 웃었습니다.
‘그대는 나의 어린애’와 ‘그대여 나에게 어리네’는 확연하게 다른 의미를 가졌음에도 문맥을 두루 살펴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노래를 외운 탓이었습니다. ‘어린애’와 ‘어리네’ 사이에서 노래의 의미는 얼마나 크게 왜곡되었는지…, ‘어린애’로 알고 들으니 노래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전 ‘라면’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처럼 말이지요.
사는 동안 우리가 잘못 읽는 것들은 비단 노래가사 뿐만이 아닐 겁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잘못 읽는 경우도 있고 특히나 사람을 잘못 읽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무엇이든 제대로 읽으려면 전후 사정이나 맥락을 두루 살펴야 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으려는 노력도 필요한데, 한번 읽고 난 후 그것을 다시 읽으려는 시도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대상을 잘못 읽게 되는 오독의 확률은 시간의 흐름을 간과하거나 알고 있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믿어버리는 경우에 한층 높아집니다. 대상에 대한 믿음은 좋은 것이지만 무조건적인 믿음, 즉 맹신盲信은 대상을 잘못 파악하는 지름길이니까요.
타인에 대해서도 오독하는 경우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변하고, 환경이 변하면 사람도 바뀌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자신이 보는 관점이나 자신이 느끼는 것만이 확실하다고 믿고 그 믿음을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그럴 경우 그 사람은 지독한 오독에 빠져 있을 확률이 꽤 높습니다.
오독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던 전체적인 의미와 그것이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를 훼손한다는데 있습니다. ‘어린애’와 ‘어리네’ 사이에 간격이 큰 것처럼 그것은 전혀 엉뚱한 의미로 전달될 수 있고 관계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더 큰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있으니까요.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내가 확신하고 있는 일들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돌아보는 일, 그것은 지독한 오독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지혜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나 역시도 당신을 오독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