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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10. 2022

182. 개똥철학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는 소위 ‘개똥철학’에 빠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사랑은 무엇인가’ ‘공부는 왜 하는가’ 등등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심오한 질문들을 잠깐의 틈만 나면 종이 위에 낙서해가며 심취하곤 했습니다.     

딱히 결론이 나는 것도 아니었지만 당시 그 질문들은 마치 내 모든 것을 뒤흔들 만큼 중요했습니다. 스님들이 던지는 화두처럼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 질문들은 어느새 대중가요 가사와 결부되어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돈이 없어 학원을 다니지 못했으니 학교를 다녀온 이후의 시간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습니다. 카세트테이프를 살 돈도 없고, 그렇다고 노래를 들을 만한 별다른 시설도 없었던 80년대, 유일하게 노래를 들을 수 있었던 곳은 동네 레코드 가게였습니다. 주인아저씨와 친해지면 강변가요제 수상곡이나 이선희의 ‘J에게’,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서면’ 등의 노래를 신청해서 들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짝사랑에 빠져 있던 그때는 그 모든 노래가사들이 왜 그리 심금을 울렸던지….     

라디오에서 심야에 흘러나오던 ‘별이 빛나는 밤에’나 ‘이종한의 밤의 디스크쇼’는 그야말로 주옥같은 노래들을 카세트테이프에 옮겨 담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기다리고 있다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는 순간 녹음과 플레이버튼을 눌러서 녹음을 했지요. 그러나 마지막 가사가 끝나기도 전에 디제이의 목소리가 시작되면 방바닥을 치며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온전한 노래를 녹음하고 싶었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녹음한 노래 테이프는 반드시 편지와 함께 건네졌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쓸 편지라면 글씨도 예쁘게 써야하고 내용도 좋아야 했기 때문에 몇 번이고 편지지를 구겨버리고 새로 쓰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글씨를 연습하게 되고 편지를 쓰는 방식도 공부 해야만 했지요. 당시에는 편지를 한데 묶은 책이 있었는데 그 속에서 꼭 ‘LOVE’라는 단어가 섞인 팝송가사는 편지에 옮겨 적는 일 순위였습니다. 뜻은 몰라도 일단 옮겨 적은 후에는 가사를 외워 부르는 일도 많았습니다.      

낙서가 취미였으니 특별한 주제가 없어도 책상 앞에 앉아 떠오르는 생각들을 주저리주저리 옮겨 적었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텔레비전 소리를 줄이거나 가족들에게 떠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둘러앉아 보는 텔레비전 소리까지 줄여버릴 정도의 특권 아닌 특권을 누리면서 낙서에 전념하고, 음악을 듣고, 실체도 잡히지 않는 개똥철학을 하는 동안 어느새 사춘기의 반항기를 드러낼 새도 없이 십대가 지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시의 심각했던 문제들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사랑이나 행복은 주된 관심사에서 멀어졌으니까요.     

모든 천재는 십대에 완성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모든 것을 바쳐서 몰두할 수 있는 나이, 그 나이 또래의 요즘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것에 몰두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지는 새해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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