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봄 Feb 10. 2022

180. 건망증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잘 나가는 시인을 만나러 용인에 있는 모 대학에 갔다가 교내에서 한참을 기다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만날 약속을 미리 잡아두었고 개인적으로는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 무슨 일로 기다리게 하나 내심 마음이 언짢기도 했습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이윽고 연구실로 와도 좋다는 전화가 와서 가보니 그 교수는 나를 보자마자 겸연쩍게 웃으며 “열쇠를 잃어버려서 다시 깎았는데 그것도 안 맞네요. 하도 여러 번 잃어버리니까 경비 아저씨도 이젠 그러려니 하시는데 횟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나서 반갑다거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보다 먼저 전한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 속 서운함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지고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은 친근함마저 들었습니다. 덕분에 서먹서먹하던 분위기 대신 건망증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지요.     

어떤 사람은 출산을 경험하는 여성이 남성보다 건망증에 더 취약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치매의 전조증상일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하기도 하는데, 내게 있어 일상 속 건망증은 이제 심각한 수준을 조금 넘어섰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가스레인지 불을 켜놓고 깜빡하거나, 휴대폰을 냉장고나 신발장에 넣어두고 찾는 것은 기본이고, 퇴근 무렵이면 오전에 주차했던 곳을 찾아 헤매는 것도 이젠 그러려니 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아이들의 생일도 잊을 때도 많고, 외워서 편지지에 옮겨 적었던 시들도 이젠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적으로 한두 번 마주친 사람들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길에서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반갑게 인사하지만 막상 돌아서면 “누구더라~”하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아예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내가 먼저 “안면인식장애가 있으니 다음에 만나서 몰라보면 한 대 때려서라도 기억나게 해 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상대방은 농담이려니 하고 웃으며 넘기지만 내게는 미안함을 넘어 기자라는 직업을 잘못 선택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건망증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누군가와 사소한 일로 다투고 난 뒤 서운했던 마음도 한나절이 지나가면 어느새 잊혀지고, 꼭 갖고 싶던 물건에 대한 욕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게 되니까요. 무엇보다 건망증이 좋은 것은 미움이라는 감정이 마음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한 달을 넘기고 일 년을 넘기기도 했던 그 감정이 이제는 하루 또는 반나절만 지나도 사라지곤 하니 말입니다.     

나이를 먹는 동안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은 일상을 불편하게 하지만 그건 어쩌면 신이 인간에게 베풀어주는 배려일지도 모릅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점점 줄어드는 만큼 남은 시간을 헛된 감정에 허비하지 말고 적당히 잊으며 살아가라는 의미가 담긴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이것은 날로 심해지는 건망증을 위로하려는 나만의 생각은 아니겠지요?     

이전 15화 182. 개똥철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