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안성에 있는 조병화문학관의 요청으로 인근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시 쓰기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조병화문학관은 내가 문청(文靑)이던 시절 시를 배웠던 곳입니다. 당시 조병화 시인의 자부子婦이신 김용정 대표는 매주 토요일마다 조병화 시인의 서재에서 수업을 듣는 우리를 위해 서울에서 내려와 차와 과자, 과일 등을 내주며 미래의 시인들을 응원해주셨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시인이 된 내가 추억이 서린 그곳에서 다시 시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들뜨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대상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진 아이들이라는 사실은 나를 설레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얌전히 앉아 내 수업을 경청하리라는 기대는 첫날부터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수업 분위기는 고사하고 수업을 안 받겠다고 나가버리는 아이도 있었으니까요. 나는 생전 처음 자괴감에 휩싸였고 그와 더불어 야심차게 준비했던 강의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평소 나의 예상대로라면 수업이 어려운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저학년은 시키는 대로 잘 하고 서로 자기 시를 봐달라며 응석도 부렸지만 정작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사춘기에 접어든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기 때문입니다. 반항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도저히 통제 불능이었습니다.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소리를 지르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날 밤은 나의 무능과 아이들에 대한 원망으로 잠을 설쳐야 했습니다.
둘째 날은 그곳에 간다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래도 약속인지라 무기력한 모습으로 교실에 들어섰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맥이 풀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아이들은 수업이 재미없다는 직언은 물론이고 심지어 다른 선생님과 비교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고 시 수업에 대한 모든 계획을 접은 후 아이들에게 진심을 다해 물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무능할 줄 몰랐어. 어떻게 해야 너희들에게 시를 알려줄 수 있을까? 지금 너희들에게 가장 힘든 게 무엇인지 글로 써서 알려줄 수 없을까?”
진심이 담긴 내 말에 아이들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종이 한가득 ‘수업아, 빨리 끝나라’고 쓰기도 했고, 어떤 아이는 ‘조금 전까지 즐거웠는데 갑자기 슬퍼진다’고 쓰기도 했고, 또 어떤 아이는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데 막막하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저 옆을 지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나도 그런 적이 있다고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습니다. 아이들은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고 그렇게 쓴 아이들의 글은 그대로 진솔한 한 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사흘이 지나고 수업이 끝나는 날, 아이들은 내게 쑥스러운 듯 한 장의 흰 종이를 건네주었습니다. 그 종이에는 아이들이 각자 고마움을 담아 쓴 짧은 편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아이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을, 누군가를 가르치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었다는 걸 말입니다. 교만하고 부족한 내게 아이들은 큰 스승으로 다가와 교훈을 주었던 것입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그때의 일은 여전히 큰 스승의 자리에서 이따금 나를 깨우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