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생존본능에 따라 ‘망각’이라는 기제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힘든 기억은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망각의 작동원리는 바로 어제의 일에서부터 멀게는 어린 시절 겪었던 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적용됩니다.
인간의 뇌는 기억과 망각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기억하고 학습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기억만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이 둘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입니다. 망각을 통해 희망이 탄생한다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망각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들추어 꺼내지 않는 한 뇌 속에서 잠들어 있는 상태로 남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힘든 기억도 시간이 가면 잊히게 마련’이라는 말은 그래서, ‘힘든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잠든다’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희망을 꿈꾸기 위해 망각하는 것이지 그것을 완벽하게 잊어버린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고통과 직결된 기억이 있다면 인간의 뇌는 극단적으로는 기억상실로, 아니면 망각을 통해 하루빨리 치유하려고 할 것입니다. 기억을 잠재우는 것이지요.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만 그래도 서서히 잠들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에게 고통을 준 가해자의 경우 피해자가 기억을 깨우지 않고 잠잠하게 지나가길 바라면서 무작정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리기도 합니다.
떠올리는 것조차 힘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도 어느새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온한 이야기들이 오갔고, 대학생들은 몰래 지하에 숨어 거짓말 같은 상황을 비디오로 돌려보기도 했습니다. 어린 내 귀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들렸지만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광주에는 이모가 살고 있었고 훗날 광주 충정로나 무등산 계곡을 찾기도 했었지만 평온한 도시 어디에서도 그런 무시무시한 고통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광주의 전말이 드러나면서 국민은 경악했습니다. 광주 시민들이 어떻게 그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었는지 지금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도 바로 어제의 일처럼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그때를 떠올리는 것은 그만큼 그 기억이 고통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잠들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던 가해자들은 되새김질 하듯 떠올리는 국민들의 기억에 놀라기도 했을 것입니다.
고통에 가까운 기억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뇌 속에서 온전히 잠들 수 있게 하려면 충분한 애도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애도의 시간이 없다면 아픈 기억은 언제든 시한폭탄처럼 터지게 마련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그런 맥락에서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광주시민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국민들조차 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지요.
이제라도 당시의 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죽은 자와 산 자 모두를 위로하는 애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릴레이 하듯 피 묻은 기억을 꺼내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기만 바라고 있을 누군가에게, 아직 우리는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다고, 그날의 기억이 날 것 그대로 살아있다고 이야기해 주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