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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8. 2022

새해 첫 출근

음력을 보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양력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날이다. 마당에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며칠을 세워둔 차는 꽁꽁 얼어있고 차 유리에도 성에가 잔뜩 끼었다.

한참 성에를 제거하고 동네를 빠져나가는 길에 며칠 모아둔 쓰레기를 버린 후 회사로 향한다. 


어제도 오늘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를 붙이기 위해 노력해본다. 오늘부터는 출근 후 한시간 정도는 책을 읽어보리라 다짐했다. 지난 몇년 간 4권에 달하는 지역사를 혼자 써내느라 탈진한 상태여서 책을 쓰거나 제대로 읽어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소득이 있다면 내 책을 냈고 간간이 청탁받은 잡지사에 시와 서평을 보낸 정도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청탁받은 2022년 봄호에 실릴 서평을 구정 전날 저녁에 마무리해서 보낸 터라 마음은 한결 홀가분하다. 


아침에 출근해서 의지대로 책을 읽는다. 처음 몇장을 읽고서도 마치 봉사의 눈이 떠지듯 무언가 마음 한자락이 환해지는 느낌을 갖게 되는 책이다. 다석 류영모가 지은 <노자와 다석>이다. 한시간여 읽는 동안 주옥같은 글에 매료된다. 어쩌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이 책 때문일지 모른다. 


"악기보다는 그 악기를 통해 나온 음악이 중요하다. 이처럼 그 사람보다는 그 사람을 통해 나온 생각이 중요하다. 누에가 고치를 이루기 위해 있듯이 사람은 생각을 이루기 위해 있는 것이다" 24페이지


류영모의 생각이 위대한 것은 이미 공자와 석가, 예수, 노자 등을 모두 하나로 아우르는데 있다. 그는 말한다. 


"유일무이한 절대 존재에게는 이름이 필요없다. '나'라고 하면 그만이다. 다른 너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 존재인 우리는 절대 존재에게까지 가명을 붙여서 우리끼리 절대 존재를 가리킨다.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인 것이 송구스러워 하느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고 한다. 모세가 하느님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이다'-출애굽기 3장 14절- 라고 하였다. -중략- 이름할 수 없는 존재가 거룩한 존재이다. 이름할 수 있으면 보잘것없는 존재다. 이름할 수 없는 존재즌 비롯도 없고 마침도 없는 무시무종의 영원한 존재다. 그러나 이름할 수 있는 존재는 있다가 없어져버리는 멸망의 존재이다." -24페이지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생각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죽음'이라고 할 것이다. 나를 살게 한 것도 죽음이고 지금의 내가 있게 한 것도 바로 죽음이다. 내게 있어 죽음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사상이다. 죽음에 견주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이르지 못할 것이 없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언젠가는 사라질 멸망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다는데 있다. 인간사의 모든 희로애락도 이 죽음 앞에서는 언제나 한낱 있다가 사라지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던 말이나, 류영모의 말처럼 사람이 생각을 이루기 위해 있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이순간도 이런 기록을 통해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하는 존재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생각을 이루기 위해,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기에 나는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힘에 겨워도 지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내가 살기 이전에 살아왔던 기록, 내가 살아가는 기록, 그 기록들은 나보다 오래 남아서 후대들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새해 하고자 했던 읽는 일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길 바란다. 그리고 올해는 조금 더 생각하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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