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모임을 끝내고 만든 뒷풀이 자리에서
우연히 구정 다음 날은 우리집으로 모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 반기는 분위기라 그러자고 했는데 막상 모이기로 한 전날까지 전화가 없다.
당일 아침에도 아무도 연락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명절 즈음에 내가 먼저 전화해서 오느냐고 묻기는 왠지 좀 그렇고,
명절인데 오기가 좀 그런가보다 싶어 오랜만에 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침대 위에서 뒹굴거렸다.
어제 설날 아침에는 평택에 거의 10센티까지 눈이 와서 그걸 몇번에 걸쳐 치우느라 진이 빠진 상태였다.
바퀴 달린 눈 치우는 도구로 몇 번을 밀어내도 눈은 쌓이고 또 쌓였다.
데크에도 눈이 하얗게 쌓였다. 하얗게 쌓인 눈이 너무 예뻐서 아무도 밟지 않은 눈 그대로 두었다.
혹여 누가 밟는다면 그저 새의 발자국 정도였으면 했다.
다행히 아무도 밟는 사람이 없으니 그 상태에서 그대로 있었고
잠시 차한잔을 마시러 거실에 나와 눈을 보면서도 잠시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그들이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이었다.
아니 안와준다면 오히려 이 한적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기분을
더 느낄 수 있겠다 싶었다.
"혹시 오시나요?"
11시경 한 사람에게 문자를 했다. 그랬더니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12시까지 모이는거 아닌가요?" 한다.
자신은 벌써 출발했다고 한다.
나는 그제야 부리나케 점심을 뭐 먹지 생각한다. 냉장고에는 떡국을 끓일수 있는 재료도 없고 반찬도 김치 한가지 뿐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나는 후다닥 코트도 없이 자동차 키만 챙겨들고 마당으로 나선다.
마당에 세워둔 차에 올라타고 인근 마트로 향한다. 아무리 대충 먹는다 해도 밥을 먹으려면 최소한 찌개에 나물 한가지 정도는 있어야 하니까.
마트에 들러 고사리, 오이, 계란, 양파 등을 사고 후식으로 먹을 비싼 딸기 한팩과 청포도 한송이도 샀다.
계산을 마치려는데 전화가 왔다.
"어디세요? 문앞에 왔는데 나가셨나 봐요."
"아, 네, 금방가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괜찮아요 기다릴께요 천천히 오세요"
딱 10분 장을 봤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 부리나케 계산을 마치고 마트를 나서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당도하니 기다리던 차에서 두 사람이 내리며 환하게 웃는다.
나는 장 본 것을 들고 집 안으로 그들과 함께 들어서자마자 정신없이 물건을 꺼내놓고 식사준비에 여념이 없다.
"회장님은 12시 반이 돼야 오신대요. 다른 사람들은 1시 넘어야 올것 같구요. 천천히 하세요"
그 말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함께 온 사람은 내가 혼자 정신 없이 움직이는 걸 보고는 팔을 걷어붙인 채 돕겠다고 나선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팔을 걷고 나서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진다. 평소 그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고 어떻게 사시는지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다른 때 같으면 주방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걸 따질 처지가 못되니 그저 고맙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재료들을 씻고 다듬는 동안 먼저 온 사람들은 거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나는 전기밥솥에 밥을 앉히고 냉동실에서 손질된 갈치 몇 토막을 꺼내 물에 담가 비늘을 벗긴다.
양념장을 만들고 무를 다듬어 썰어 냄비에 넣고는 갈치조림을 앉혀놓았다.
고등어를 에어프라이어에 넣어 돌리고, 고사리를 볶고, 오이 무침과 냉이 무침을 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정신이 없는 나를 보고 옆에 있는 사람이 한마디 한다.
"집안 일은 아무것도 못하게 생겼는데 척척 하시네요"
아마도 내가 집안일은 하나도 못할 것이라고 짐작했나보다. 그 짐작이 무색하게 오늘은 내가 직접 텃밭에서 키워 혼자 꽁냥꽁냥 담가 항아리에 묻어 두었던 김장김치 맛을 보여줄 참이다. 알맞게 익은 김치는 오늘 점심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 분명하다.
후딱 차린 점심상에 둘러앉아 모두 수다를 떨며 식사를 했다.
후식으로 나온 딸기와 청포도, 집을 방문하는 이들이 사가지고 온 과자와 커피, 그리고 발렌타인 21년산이 우리의 수다를 무르익게 한다. 햇살은 흰 눈이 가득 쌓인 데크 위를 느릿느릿 훑으며 지나가고 우리들의 수다는 소소하게 무르익으며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