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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8. 2022

생명의 모자

아침부터 쌀쌀하더니만 오후가 되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나는 넓은 창가에 앉아 데크 위에 내려앉는 눈을 바라본다. 

많이 내리지는 않을 모양이다. 내리는 즉시 사라지는 걸 보니 말이다. 

세상은 고요하고, 멀리 있는 풍경은 평화롭다. 


어제 저녁부터 시작한 생명의 모자뜨기를 늦은 밤에서야 끝내고 

오늘 오전 윤상용 선생님께 전달했다. 선생님은 아마도 내일 오후부터 

아프리카로 보낼 소포 싸기를 시작할 것이다. 

그 소포에 내가 뜬 신생아용 모자 두개도 담기게 될 것이다. 바늘이 큰게 와서 큰 바늘로 떴더니 솜씨가 없는데다가 울퉁불퉁 한것이 영 신통치 않다. 이왕이면 이쁘게 떠서 보내고 싶었는데 아쉬움 가득하다. 

아프리카는 낮과 밤의 기온차가 커서 신생아 사망률이 높다고 한다. 

그곳 산모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매년 해 오는 생명의 모자뜨기가 올해는 조금 늦었다. 

평택항되찾기운동사 책 집필과 청탁받은 평론 때문에 마음이 급했기도 했거니와

이런저런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해 차일피일 뒤로 미룬 탓이다. 

그러다 윤상용 선생님이 페북에 아프리카로 보낼 소포를 함께 포장할 봉사원 찾는다는 글을 보고

그제야 정신이 들어 부리나케 인터넷으로 실을 주문했다. 

실은 명절 연휴동안 도착하지 않았고 연휴가 끝난 어제 오후에야 도착했다. 


모자 하나를 뜨는데 꼬박 세시간 정도가 걸렸다. 

며칠 전부터 류마티스관절염 처럼 손가락이 아파서 고생을 하는데 

모자를 뜨려니 손이 이내 뻣뻣해졌지만 아가들의 생명을 살린다는 보람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생명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방문하는 안중 엄마네 집에 가서 오늘부터 엄마 구술작업을 시작했다. 

아빠와 함께 아침식사를 마친 후 상 하나를 펴놓고 엄마부터 구술을 했다. 

아빠와 재혼하기 직전까지 엄마의 삶을 구술작업 한 후 아빠의 삶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두분이 만난 시점에서부터는 두분을 대상으로 함께 해온 삶을 적을 것이다.

엄마의 나이가 여든 둘이고 아빠의 나이가 일흔 다섯...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의 격변기를 모두 겪으신 분들의 이야기가 꽤나 심금을 울릴 것이다. 

자식들 나눠볼 수 있을 정도의 책이면 충분하리라. 

그분들의 생을 듣는 것만으로 나의 뿌리를 정립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오늘은 엄마의 어린시절부터 돌아가신 아빠를 만나는 대목까지 전해들었다. 

나머지는 다음주 토요일에 마저 들을 예정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어제 읽다 중단한 <노자와 다석>을 읽는다. 

600페이지 분량의 꽤 두꺼운 책이지만 초반만 읽어도 내 인생의 지침이 될 책임을 감지한다.

머리맡에 두고두고 아껴 읽을 책이다. 

하늘이 낮아지고 사위는 점점 어둑해진다. 

어제가 입춘이라고 했던가. 

집 앞 소나무에도 어제는 막걸리 두병을 사다 뿌렸다. 소나무 할아버지 건강하세요 하면서...


집에 들어와서야 나는 한번도 삼백년된 소나무 앞에서 내 건강이나 아이들의 안위를 빈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나 기원을 하면 나와 자식들의 안위를 부탁하게 마련인데, 난 그 앞에 서면 도무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이대로 고요히 앉아 이내의 시간을 맞는 지금이 참 평화롭고 좋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특별한 일이 없어도, 이대로 주위에 있는 생명들을 느끼며 나도 그에 어울리는 하나의 생명이 될수만 있다면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렇게 사위어 갈 것이고, 내가 있던 흔적도 차차 지워지겠지. 그 모든 것들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사라질 수 있다는 것, 끝이 있다는 것, 완벽한 무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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