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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봄 Feb 08. 2022

일탈

어제 저녁 컨디션이 좋지 않아 오늘 하루 월차를 내기로 했다. 1년이면 회사를 나가지 않는 날을 손에 꼽을 정도로 지내는 내게 회사를 하루 쉰다는 것은 오히려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가끔 하고 싶은 일탈의 한 지점일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에 눈이 떠져도 집안을 어슬렁거리며 햇빛을 따라가며 지낼 수 있다는 것은 평소 내가 느끼지 못한 새로운 일탈이 분명하다. 


혼자 사는 이의 아침은 언제나 그렇듯 사람 소리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된다. 텔레비전을 틀어야 그나마 들을 수 있는 사람의 음성은 언제 들어도 참 반갑다. 그중에서도 밝고 한 톤 높은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홈쇼핑이다. 다양한 상품들을 가지고 나와 높은 톤의 목소리로 자세히 설명하는 웃는 얼굴의 쇼호스트를 볼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를 힘이 솟는다. 마치 재래시장에 가서 이른 아침부터 장사를 시작하는 상인들을 볼 때처럼 말이다. 살아있음,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들이 있음, 그들도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홈쇼핑 물건을 사는 일이 늘긴 했지만 그것도 별도의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질 좋은 물건을 구입해서 집까지 배달시킬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로봇청소기를 돌려놓고 냉장고에 있는 빵을 꺼내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160도 온도에 10분을 맞춰 시작버튼을 누른다. 커피포트에 물을 넣어 끓이고 평소 시간이 없어 먹지 못했던 북어껍질도 물에 넣어 불린 후 지느러미를 잘라 들기름에 비벼준다. 이것은 빵을 꺼낸 후 에어프라이어에 돌려 책을 읽는 동안 간식으로 먹을 참이다. 


빵과 커피, 간식, 그리고 책과 노트북을 들고 햇볕 좋은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흰 구름 몇점이 하늘에 둥실 떠있고 저 멀리 도로에는 차들이 달린다. 오래 전부터 달리는 차들을 보면 생각에 빠지는 습관이 있다. 


"저 차들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걸까"

마치 붓다가 인간의 생을 생각하듯 나 역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정답을 구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 생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저 너머는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고 이쪽은 시골이다. 제법 높은 위치에 자리잡은 우리집 아래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다. 집도 띄엄띄엄이다. 우리 집 맞은 편에는 집 한채, 그리로 옆에도 집 한채, 노인들이 산다. 

어쩌면 이 집이 갖는 매력은 그런데 있는지도 모른다. 불멍을 해도 좋은, 혼자 잠옷바람에 마당을 어슬렁거려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곳. 


나는 음악사이트에서 '재택할때 좋은 음악'을 골라 와이파이 스피커를 연결해 틀어놓고 앉는다. 베란다 창가에 놓아둔 고풍스러운 빨간 의자, 그 위에 얹어 둔 하얀 양털은 오래 앉아 있어도 힘들지 않다. 데크 한켠에는 햇볕이 잘 들지 않아 며칠 전 쌓였던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채 그대로다. 이 평화로운 마음으로 나는 오늘 하루를 보낼 것이다. 아무도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 집, 대문 앞에 꽤 큰 택배까지도 거뜬하게 넣어둘 수 있는 빨간 우체통이 있는 집. 이 집에서 나는 마음껏 평화로울 것이다. 아주 오랫만에 해보는 제대로 된 일탈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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