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존엄

가치가 서면 어디에서든 떳떳하게 일할 수 있다

by 산들바람

우리 동네 쥬씨(생과일 쥬스 전문점)에는 장국영 닮은 아르바이트생이 있다. 이 청년이 만들어주는 커피 맛과 쥬스 맛은 남다른 데가 있다.

쥬씨 청년이 내려 준 커피 맛은 한결같다. 평소 음미하던 맛이 아니라면 그건 내 컨디션의 문제다. 탬핑 자세가 좋아야 힘들이지 않고 오래 일할 수 있다. 초보의 경우 손목의 힘으로만 탬핑하는데, 그러면 얼마 안 가서 손목이 나간다. 탬핑 자세의 정석은 없다. 키, 몸무게 등 각 사람의 개성이 다른 것처럼 개인에게 맞는 탬핑 자세가 따로 있다. 쥬씨 청년은 한결같은 맛을 내기까지 자신에게 맞는 탬핑 자세를 찾고 또 찾았다. 그리고 3년 동안 결근 한번 없이 일했다.

나는 밥 먹을 시간이 없으면 카페라떼로 끼니를 대신한다. 쥬씨 청년은 롤링도 탬핑같이 해 나간다. 그가 만들어준 카페라떼를 음미하다 보면,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입안에서 녹듯 공복으로 날카로웠던 신경이 누그러진다.

쥬스를 만드는 건 커피보다 손이 더 간다. ‘딸바’의 경우 딸기, 바나나, 우유, 설탕의 황금비율이 있다. 이 황금비율에 따라 한 잔이면 한 잔, 두 잔이면 두 잔의 양이 딱 떨어져야 맛 좋은 쥬스라고 할 수 있다. 한 잔 분량의 레시피로 계량했는데, 쥬스 양이 모자라거나 남았다면, 쥬스의 농도나 질이 떨어졌다는 얘기다.

쥬씨 청년은 쥬스도 탬핑과 롤링처럼 딱 떨어지게 만든다. 손님이 많으면 사장님이 빨리하라고 재촉할 때도 있는데, 우선은 “네”라고 대답하고 자기 원칙대로 한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가 철칙이라서 2초, 3초 단축하려다가 양 조절에 실패할 바엔,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제대로 하겠다는 배짱을 부린다. 사장님도 더는 잔소리하지 않는데, 사장님 성격도 청년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는 먹을 것에 까다로운 편이라 새로운 곳을 쉬이 방문하지 않는다. 한 번 꽂히면 그곳만 간다. 그러다 맛이나 서비스가 변했다 싶으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발길을 끊는다. 내가 우리 동네 쥬씨를 찾은 지 올해로 벌써 3년째. 3년 전 내가 처음 맛본 ‘딸바’를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장국영 닮은 청년 김기성 씨다.

“어떤 알바생들은 왜 영혼 없는 표정일까요?”


늘 활기찬 눈으로 주문받는 기성 씨에게 한 질문이다.

-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해보니 힘들고, 돈도 얼마 안 되니까, 시간이나 때우고 가자는 마음에서 아닐까요? 언제라도 잘릴 수 있는 소모품 인생이니까요.


내심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 짐작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아서 그래요.”


기성 씨는 무능한 사장 50%, 갑질 손님 50% 때문에 아르바이트생이 영혼 없이 일하다가 그만둔다고 말했다. 일이 숙달되도록 교육받아야 하는데, 사장도 뭘 모르면서 무조건 일을 시키니 실수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잘한다는 인정은커녕 반말하는 손님, 맛을 꼬투리 잡아 환불받으려는 손님을 상대로 욕먹지만 않아도 다행이니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기성 씨도 뭘 몰랐을 때는 시간이나 때우고 돈 받아 갈 요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한 지 3일 만에 그만둘 뻔했다. 주문이 45개나 밀린 날이었는데 일이 끝나자 사장님이 가르쳐 준 것도 못 하냐며 화를 냈단다. 기성 씨는 “나는 어디 가서도 일 못 한다는 소리를 못 들어 봤다. 그렇다면 그만두겠다.”라고 맞받아쳤다. 사장이 슬며시 잡아서 없던 일이 됐는데, 그 후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커피 만드는 법, 쥬스 만드는 법, 손님을 상대하는 법을 익혔다. 마스터로 정점을 찍고 자존심을 회복한 후라야 그만둬도 그만둔다는 각오를 하고서 말이다.


이렇게 일할 수 있는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내가 손님이라면 어떨까를 생각해요. 똑같은 돈을 주고 마시는 데 맛없으면 돈 아깝고 화나잖아요. 돈과 시간을 뺏은 거니까요. 그런데 손님이 맛있다고 하면 뿌듯해서 재밌어요.”

기성 씨의 원래 꿈은 가수였다. 하지만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깨닫고 돈을 벌기로 작심했다. 우선 초밥 전문점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여기서 서비스업이 적성에 맞는다는 걸 알았다. 여자 아르바이트생보다 더 많은 TIP을 받을 정도로 친절함이 몸에 뱄던 거였다. 그런 다음 쥬씨로 이직했다. TIP은 없지만, 커피와 쥬스 만드는 기술을 익히면서 서비스 마인드를 키워나가기 위함이었다. 같은 서비스업이라도 기성 씨가 직접 만든 커피와 쥬스를 손님들이 좋아하니 일하는 재미가 더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성 씨를 설레게 한 손님이 있냐고 되물었다. 그는 말없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출근 시간, 항상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던 중년 남성이 있었는데, 어느 날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고 한다.

“여기 커피를 마시면 하루가 기분 좋아요.”


1,000원짜리 아메리카노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도 있구나’ 생각하니 그때부터 허투루 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자기개발서에 나올 법할 뻔한 대답을 들었지만, 뻔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일해 왔는지 내가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하기 힘든 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극복했는지가 궁금했다.

“일은 모르겠는데 뭘 몰라서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 찝찝해요. 손님에게 죄송하고.”


초창기엔 지금같이 맛있게 못 해서 떳떳하지 않았단다. 그러나 다른 매장의 사장님에 비해서 호되면서도 일을 잘 가르쳐주는 사장님과 “너는 어디서든 살아남겠다. 굶어 죽지 않겠다. 생활력이 강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운보다는 노력을 믿는 성격이 합해져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혼나야 더 잘한다는 오기와 끝장을 보겠다는 근성으로 말이다.

기성 씨는 뭘 알아야 재밌지, 모르면 흥미를 잃는 성격이란다. 또 어려운 문제라야 푸는 재미를 느낀단다. 모든 메뉴 만드는 방법을 다 통달하고 각기 다른 손님에 맞춰 유쾌하게 일하는 노하우가 생기니, 이제는 자신의 카페를 차려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고 한다. 창업을 생각하니 그때부터 일머리가 생겼고 일머리가 생기면서부터 기성 씨가 사장님 아들이냐고 묻는 손님도 있다고 한다.

기성 씨는 무슨 메뉴를 주로 시키는지 기억하는 손님을 단골이라고 생각한단다. 기성 씨가 손꼽는 단골손님만 50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단골손님에게 맛이 어떤지 피드백 받고 더 좋은 맛을 내려고 노력하고 단골손님이 더 인정해주고. 이렇게 일하니 불경기에도 그의 단골손님의 발길은 끊기지 않는다. 자연히 사장님께 신임을 얻게 되어 시급도 올려 받고, 3년이면 권태기인데 매장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더 좋은 맛을 내는 방법을 연구하는 지금이 제일 좋다고 한다.


밤 11시 퇴근 시간, 정리를 끝냈는데 들어오는 손님이 있다고 한다. 퇴근 시간이 늦어져 솔직히 짜증 날 때도 있지만, 돌려보내기는 미안하니 주문을 받는다. 대신에 메뉴는 통일하라고 시킨다. 그래도 군말이 나지 않는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뿜어내는 카리스마. 이렇게 일하는 사람을 누가 업신여길 수 있을까.

가치가 서면 어디에서든 떳떳하게 일할 수 있다. 어느 광고에 나온 것처럼 아르바이트는 무직이 아니다.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대기업 정규직이 아니더라도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기성 씨가 활기차게 만들어 서비스한 아메리카노가 중년 남성의 하루를 기분 좋게 열고, 중년 남성의 즐거운 마음이 다른 동료에게 가닿아 일터에 활력이 생기는 선순환. 기성 씨가 만든 아메리카노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지급되는 1,000원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시급이 만 원이라면? 안정적인 공무원, 대기업 정규직의 월급이라면? 아니다. 그 어떤 돈이라도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존엄한 가치가 기성 씨에게 있다. 이런 아르바이트생이 어디 기성 씨뿐이겠는가. 청년 김기성 씨를 통해 이 땅의 모든 아르바이트생은 존엄하다는 걸 그래서 그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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