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한 '회피형 INFP'의 행위예술

회피형 INFP가 각성하면 벌어지는 일 7화 |

by 산들바람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

2025년 1월의 어느 날, 265만 원짜리 노트북이 세 번째 고장 났다. AS센터에서 "동일 증상 3회가 아니라서 교환이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을 때,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매뉴얼만 반복해서 말하는 직원과 말하다 보면 나를 감정이 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는구나,라는 자괴감이 드니까. 그냥 무상 수리를 맡기고 집으로 돌아와 안전한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퇴직금을 털어 산 비싼 노트북인데 고장만 벌써 3번, 또 고장이 난다면, 나중엔 품질보증기간도 끝나서 교환받을 수도 없는 조건에서 노트북을 수리받고 또 수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나는 회피형이니까. 손해 보고 말자.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연재를 마친 자전적 소설 때문이었을까... 32편의 연재를 통해 깨달았다. 나는 얼마나 자주 도망쳐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는지를. 그래서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MBTI - INFP 네 개의 목소리


내 안의 네 가지 성향(I/N/F/P)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장소는 늘 그렇듯 아늑한 이불속. 의제는 '265만 원짜리 고장 난 노트북을 어떡할 것인가.'


"또 도망칠 거야?"

내향성(I)이 익숙한 톤으로 말했다. 이미 도망칠 완벽한 계획이 있는 듯했다.

"그냥 수리하고 말자. AS센터 팀장님도 무서워 보이고... 갈등은 피하는 게 좋아. 여기 아늑한 이불속에서 책이나 읽자."


"잠깐만!"

직관(N)이 갑자기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AI한테 물어봤더니 이게 소비자기본법 위반이래.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의하면 동일하자 2회+하자면 교환/환불 가능이라는데? 근데 회사는 동일하자 3회라고 하고... 여기 뭔가 있어. 더 큰 그림이 보여!"


감정(F)은 창가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우리만 이런 게 아닐 거야. 지금도 어디선가 같은 일로 속상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그냥 넘어가면... 다음 피해자는 누가 될까?"


"법적 대응은 좀..."

내향성(I)이 움츠러들었다.

"변호사비도 비싸고..."


"아니지, AI가 있잖아!"

직관(N)이 다시 번뜩였다.

"AI랑 같이 법 공부하고, 내용증명도 쓰고, 소장도 쓰고... 우리도 할 수 있어!"


"근데 말이야..."

인식(P)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꼭 법적 대응만이 답일까? 우리만의 방식으로 풀어볼 수 없을까?"


"우리만의 방식이라니?"

다른 세 목소리가 동시에 물었다.


"카카오브런치에 연재하는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인식(P)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법적 대응도 준비하되,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뭔지,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네 목소리는 마침내 하나가 되어 키보드 위로 떨어졌다.

노트북 고장 실화입니까?
회피형 INFP가 각성하면 벌어지는 일


3. 거절의 연속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하면..."

1372 소비자상담센터 상담사의 말끝이 흐려졌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고..."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도 같은 뉘앙스였다.

모두가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가족도 뜯어말렸다. 거대 기업을 상대로 싸워 이긴 사례가 얼마나 된다고. 이해는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억울했다.

마지막으로 지방법원 무료 법률상담을 찾았다. 또다시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겠지.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4. 전환점

무료 법률 상담해 주신 분은 조정위원이시기도 한데 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주셨다. 아마도 사건 경위와 내가 원하는 바는 명확하게 적시한 문서가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았다. 그리고 "단순히 사바사바 넘어가자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하시는 거죠?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며, 내 이름도 다시 한번 물어봐 주시고,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여기서도 저기서도 알아보세요!"라고 응원해 주셨다.


순간 딱딱하게 굳은 마음이 솜사탕처럼 풀어졌다. 처음이었다. 누군가 내 진심을 알아봐 준 게. 그동안의 억울함과 분노가 한순간에 스르르 풀렸다. 그리고 더는 피해자 포지션에 서지 않았다.


인간은 이해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진정한 이해를 받았을 때, 상처는 치유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노트북을 불안해서 더는 사용할 수 없다는 불안을 이해해 달라는 것과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근거해 교환/환불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과

이로 인해 소비자기본법과 상충하는 내부 기준을 개선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난 XXXX(주)가 소비자에게 진정으로 사랑받는 기업이 되기를 바라는 1인이니까.


5. 예술이 된 순간

카카오브런치에 르포를 연재할수록 문체가 점점 변했다. 분명 대기업의 품질보증제 개선을 위한 비판적인 글을 쓰려했는데, 한 챕터를 마치면 다음 챕터에 따라오는 생각이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정작 대기업은 무슨 꿍꿍이 인지 묵묵부답인 와중에 나는 변화성장하고 있는 상황. "네가 아무리 천사의 말한다 해도 네 안의 사랑 없으면 아무 소용없네." 그동안 정의를 외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살아왔던가. 하지만 그 정의는 누구를 위한 정의였나. 그래서 그 정의가 세상을 이롭게 했는가? ENTP 학생노동운동을 하던 대학새내기가 세상 속에서 좌충우돌 깨지며 겨우 사회회 된 게 INFP였다. 좌충우돌의 상 회피형의 상흔 남겼고. 그래서 더는 정의라는 방패막으로 바른말을 따박따박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노트북 환불 지연 사태는 나의 따지기를 좋아하는 직성을 정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퀘스트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이 퀘스트를 깨기 위해 하나의 행위예술을 했다 하겠다.


회피하고 싶었던 순간부터, AI와 함께한 법률 공부, 카카오브런치 연재, 관점의 변화까지.

한 회피형 INFP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판단에서 이해로 나아가는 행위예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월 30일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다. XXXX(주)의 공식 입장을.

부디 나의 행위예술의 엔딩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기를 두 손 모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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