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한테 사진작가로서의 재능이 있나요?”

"재능이 문제가 아니라 5년, 10년 후에도 계속한다는 게 중요한 거야"

by 산들바람


나는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이다. 크게 관심도 없다. 풍부한 감수성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보다는, 사회 문제의 근본 원인을 밝혀내어 대안을 제시하는 지적 활동에 매력을 느낀다. 그런 내가 감수성과 공감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에 발 담그고 있다.

나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향은 성장기,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많은 문제를 낳았다. 사사건건 문제를 따지고 드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착해서 내 얘기만 들어주었던 단짝이 큰마음을 먹고 속내를 드러냈을 때 진심으로 기뻤다. 나를 진짜 친구로 여기는구나.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친구의 말을 듣고 여러 말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면 친구와 꼭 어색해졌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영문을 알지 못한 나는 내가 이상한 건지, 세상이 이상한 건지 혼란스러웠고 결국엔 “그래. 나 이상한 사람이다.” 하고 삐뚤어졌다.

자신의 문제를 알려고도, 알아도 인정하지 않았을 고집스러움은 외로움의 극치에 다다르게 했다. 그제야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상한 나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곳은 없을까. 그래서 찾아낸 곳이 예술계였다. 예술계는 ‘또라이’가 많다니, 자기 고집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니, 살아남으려면 예술계에 몸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음치, 박치에 글쓰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림은 흉내도 못 낼 것 같고,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그래! 하고 무작정 카메라부터 샀다.

니콘의 (D70s과 번들렌즈)와 함께라면 나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빛을 발했다. 삼각대를 세워 놓고 야경을 찍고 있으면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부러워했다. 사람과 어울려 사는 게 힘들 때면 카메라 한 대만 둘러메고 발길 닿는 대로 유랑했다. 일상에 메이지 않고 여행하는 삶, 얼마나 근사한가. 혼자 밥을 먹어도 찍은 사진을 보며, 아! 내가 이런 사진을 찍다니, 감탄하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자유로움을 즐기는 길 위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피사체를 보면 여기서 한번, 저기서 한번. 원하는 의도가 사진에 담길 때까지 백 번이고 찍었다. 신들린 듯 몰입했다. 물아일체. 환희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전율했다.

결국, 사진으로 먹고살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프로 사진계에 입문하기 위해 사진 학원(대학 사진학과에 들어갈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에 들어갔다. 그때 나이가 28살, 늦었다면 늦은 나이였지만 용기를 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데 20대 초중반의 동기 속에 섞여서 사진 공부를 하다 보니 점점 주눅이 들었다. 사진계는 프로 작가가 되기 위해 3대 요건을 갖춰야 한다는 정설이 있다. 바로 ‘가오, 말발, 재력’이다. 훤칠한 키에 연예인 뺨치게 생긴 친구, 영업하면 수억을 벌 것 같이 입담 좋은 친구, 집안에 자기 스튜디오를 갖춰 놓고 사륜구동차로 출사 다니는 친구, 그 속에 끼어 있자면 주눅은 초라함으로 변했다. 그럴 때마다 오기로 버텼다.


결핍은 욕망을 낳는다. 욕망은 열정을 불태운다. 나는 쉬지 않고 사진을 찍고 암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열정과 노력은 성과로 이어진다, 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한 학기를 갈무리하는 학원 내 전시회에서 내가 제일 존경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인정받았다. 내 포트폴리오를 교재 삼아 후배 기수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다른 선생님은 나의 작품에 감동적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저한테 사진작가로서의 재능이 있나요?”

“재능이 문제가 아니라 5년 후, 10년 후에도 계속한다는 게 중요한 거야.”

사진으로 먹고살 수 있는지, 재능을 확인받고 싶었던 나의 조급증에 선생님은 자신의 사진을 좀 더 사랑해주라고 답했다. 이 말에 기대어 나는 사진에 인생을 걸었다.

졸업 무렵, 사진가로서 평생 주제를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학생운동을 했던 나는 ‘자본주의로 인한 인간 소외’라고 답했다. 그러나 나의 비전을 이끌어줄 스승이 없었다. 같은 길을 갈 친구도 없었다. 내가 다닌 사진 학원은 광고사진전문학원인 것이었다. 사진이 뭔지도 모르고 예술계에 발을 담근 무지의 소산이었다. ‘자본주의로 인한 인간소외’를 사진에 담을 수 있는 영감을 내려받는 곳이 아니라 열정 노동을 강제하며 적선하듯 사진 테크닉을 가르쳐주는 스튜디오에서 일하다 끝내는 건강을 잃고 사진계를 떠났다.


사진 기술이 아니라 사진에 담을 철학과 작가로서의 소양을 쌓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합리화는 그럴듯했고 돈도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낮에는 사진 공부를 하고 밤에는 돈 벌 수 있는 일을 했다. 월급도 꽤 주니 3년만 일하다가 돈 모으고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사진 전선에 다시 뛰어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 누구도 그러라고 하지 않았지만, 가장 역할을 도맡았다. 사진에서도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는데 생활고에 발목이 붙잡혔다고 생각하니 새벽,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많이도 울었다.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의지하면서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몸에서 사리가 나올 것 같은 회사생활 5년, 마침내 동생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나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사진을 찍은 지 17년이 훌쩍 지났다. 사진에 사유를 담기 위해 글을 쓴 지도 10년이 넘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 말은 진리다. 17년 전만 해도 사진작가는 ‘가오, 말발, 재력’이 있는 사람의 전유물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도 문단에서 인정받아야만 글을 발표할 수 있었다. 지금은 자기 능력만 있으면 핸드폰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누구든 SNS에 자기 작품을 발표할 수 있다. 출판사의 두꺼운 벽을 뚫지 않아도 독립출판으로 사진 작품집을 발간할 수도, 독립서점에 입고시킬 수도 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사이 나라는 사람도 많이 변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회사 생활한 경험은 이 시대 가장들의 어깨에 지워진 무게를 느끼게 했다. 글을 쓰면서 일깨운 절약 정신은 100원에도 악착을 떠는 주부들의 처지를 공감하게 했다. 그 부모 밑에서 무한 경쟁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1998년 IMF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막아내지 못한 무능한 어른으로서 가진 부채감이다. 이 부채감이 원동력이 되어 나는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감수성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사진을 하지 않았다면 계발되지 않았을 감수성, 공감 능력. 이제는 친구들이 하소연할 때 말을 가로채지 않으려고 입을 앙다문다.


ㅡ 분석하지 마. 판단하지 마. 마음이 풀릴 때까지 가만히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여전히 친구들과 얘기할 때, 어색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은 어색함을 바로 눈치채고 마음을 알아주려고 심기일전한다. 나란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한 친구들은 그러려니 한다.


몇 년 전부터 꽃이 눈에 들어온다. 온실 속에서 자란 색색의 장미가 아니다. 5월, 바람에 몸을 맡기고 햇빛을 쐬는 들장미의 청아함. 들장미를 어여쁘게 품고 있는 풍경을 잠잠히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느낌 적 느낌이 온다. 그때가 셔터를 누를 때이다. 이때라서, 나라서 찍을 수 있는 사진을 보며 곱다, 참 곱다 하면서 기뻐한다. 좋은 것을 나만 볼 수 없다. 찍은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깨톡으로 보낸다. 곧이어 답톡이 온다. 땡큐. 고마워. 고맙다. 감사합니다. 내가 보기 좋아 찍은 사진이 타인에게 선물로 가닿고 나에게 기쁨으로 되돌아오는 삶, 사진이 내게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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