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에게 여행이란 먹고 놀고 즐기는 것. 어떤 사람에게 여행이란 일상에서 살아갈 힘을 충전해 오는 것. 어떤 사람에게 여행이란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것.
2012년 6월, 일상의 무게로 어디론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로서의 꿈을 꾸게 됐는데 현실이란 먹고니즘이 발목을 잡더라구요. 골치 아픈 현실에 맞서 싸울 힘도, 용기도 없는 저는 도망갈 곳이 필요했습니다. 자연과 함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생각을 정리하고 그로부터 얻은 에너지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그런 여행지로 제주는 참 좋은 곳입니다. 제주 올레길을 걷기로 하고 떠나기 전날 비행기 표만 예약했어요.
마지막 비행기로 제주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찜질방에서 해결하고, 여행 둘째 날 한라수목원을 둘러보고 14시 배로 추자도에 들어갔습니다. 추자도는 올레 8-1코스가 있는 제주도에서 2시간 들어가야 하는 꽃길이 아름다운 섬입니다. 16시 정도에 추자도에 도착하여 추자도 특산물이기도 한 참굴비로 만든 정식을 먹고 올레길을 걸었어요.
올레길을 따라 걷는데 제가 12살 때로 시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시간이 멈춘 듯 오래된 마을. 그러나 초라하거나 촌스러워 보이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색 빌딩에 똑같은 아파트로 획일적이고 삭막한 도시보다 좋았어요. 담이 낮은 집마다 개성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마을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마을을 벗어나 봉글레산 정상 도착하니 해가 지고 있었어요. 어린 왕자는 슬퍼지면 해를 보고 싶다고 했어요. 어린 왕자의 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해지는 것을 보는 데 아주 쓸쓸했습니다. 제 쓸쓸함이 해와 함께 사라질 때까지 저는 오래 앉아 있었어요. 바람이 거세지어 서둘러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습니다. 슈퍼에서 사 온 맥주 한 캔을 가볍게 마시고 김포공항에서 사 온 황상민 교수의 책 ‘독립연습’을 읽다 잠이 들었어요.
다음날, 알람은 새벽 5시에 맞추어 놓았는데 섬 날씨는 종잡을 수 없더라구요. 5시에 일어나니 온통 깜깜한 하늘과 바다에 일어나봐야 할 일도 없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조금 더 자기로 하는데 몸이 가라앉더니 결국 가위에 눌렸습니다. 가위눌림에서 벗어나려고 한동안 몸부림치다가 이러다 여행을 망치겠단 생각에 조용히 속으로 말했습니다.
‘나가 주세요. 나가 주세요. 나가 주세요.’
그러자 신기하게 온몸에 힘이 ‘탁’하고 풀리면서 가위에서 벗어났어요. 그리고 잠을 청하면서 생각했습니다. 많이 피곤했나 보다. 극기 훈련하러 온 것도 아닌데 늘어지게 자자. 그렇게 10시에 일어나서 늦은 아침을 먹었습니다. 올레길을 구석구석 다 돌아보겠다는 계획을 전면 수정해서 마을을 어슬렁어슬렁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어요. 나중에 이 섬을 배경으로 하는 글을 쓰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날씨가 좋지 않아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준비해간 ‘스댕물잔‘에 맥심 봉지 커피를 타서 마시고 ‘울음’에 대한 에세이를 썼어요.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집중력이었어요. 내 안에 이렇게 하고 싶었던 얘기가 많았구나. 생각나는 걸 글로 따라 적기가 너무 바빴습니다. 글을 쓰다가 잊고 있었던 서글픔 때문에 한동안 울기도 했어요. 누가 보면 미쳤다고 했을 거에요. 다 쓰고 나니 속이 후련하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에너지 바를 챙겨서 올레길을 또 걸었어요.
올레 표식을 따라 걷다 보니 마을과 산으로 가는 입구에 도착했는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쩌지? 내려갈까? 그러면 앞으로 비슷한 상황에서 너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거야! 이런 생각에 산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래도 무서운 건 마찬가지라 하늘님께 기도하며 걸었어요.
어느새 좁을 산길에 정신이 팔려서 사진을 찍다 보니 정상에 가까워져 있었어요. 가파른 계단 길을 따라 올려다보니 빽빽이 서 있는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찬란한 햇빛에 천국의 계단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마지막 정상을 위한 한걸음. 이 한 걸음 딛고 나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그리고 내디딘 걸음 앞으로 푸른 바다가 하얀 하늘과 만나 있었어요.
‘하늘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하늘님께 감사 기도했습니다. 왼쪽엔 산의 나무, 오른쪽엔 바다의 물결을 번갈아 가며 감상할 수 있는 장소는 아주 특별했어요. 저는 봉골레 산 능선을 따라 걸었어요. 이 산에 저 혼자밖에 없어 거칠 것이 없었어요. 그렇게 산 하나를 다 넘어오니 배가 고픈데 갈비를 너무 먹고 싶었습니다. 머릿속에는 온통 갈비생각뿐이었어요. 산 하나를 다 넘고 서둘러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2인분 시키는 것으로 식당에 차릴 수 있는 예의는 다 차린 거야.’ 갈빗집에 들어가지 못해 망설이는 저에게 H 언니가 용기를 주었고 그 덕분에 체면이고 뭐고 저는 갈빗집으로 들어갔어요. “식사는 안 돼요.”라는 이모님의 말에 저는 갈비 먹을 꺼에요, 라고 용기내어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모님은 여자 혼자 갈비 2인분을 시키는 것에 처음에는 의아해하시더니 곧 아무 상관 안 하시더라고요. 다른 손님들도 그분들 얘기에 바쁘지, 저는 신경도 쓰지 않았어요. 그래 다른 사람은 나에게 그렇게 큰 관심이 없어. 그런데 난 왜 이토록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살아가지?
그리고 1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저는 어떻게 변해있을까요?
네 맞습니다. 30여 년 넘게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는데 그 습관이 단번에 고쳐지겠습니까. 그래도 전보다는 일상의 무게로 어디론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덜 하게 됐습니다. 현실이란 게 여전히 발목을 잡아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제주 추자도 여행은 그렇게 저를 일상에서 살아갈 힘을 충전해줬고 재탄생을 위한 발판이 돼주었습니다. 거기에 코로나 펜데믹 기간 동안, 겨울잠을 자듯 고독을 즐기며 저라는 사람의 좋은 점, 나쁜 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험을 했고, 인간관계도 재검토하여 이제는 건강한 관계를 맺는 기준을 갖게 됐습니다. 고깃집에 혼자 갈 수도 있지만, 제주 여행에서 ‘고기란 같이 구워 먹는 게 맞있구나’라는 걸 느꼈기에 가족과 친구에게 더 잘해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습니다. 2012년 6월에 떠난 제주 여행이 저에게 준 선물입니다.
다시 10년 후에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저의 본성대로 살아도 타인에게 폐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꿈꿔봅니다. 그렇게 여행은 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원동력이 되어줄 테지요. 제주의 푸른 바다가 보고 싶어지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