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을 포장하며
공동체 '우리동네사람들(이하 우동사)'은 서서히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에너지는 유입되지 않았고, 남은 이들의 어깨는 무거웠다. 우리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반야 스쿨'이라는 야심 찬 사업을 시작했다. 교육과 셰어하우스를 결합한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첫발이었다. 하지만 의욕이 무색하게도 시작과 동시에 균열이 생겼다. 누군가는 쏟아야 할 에너지의 무게에 질려 먼저 손을 놓았고, 두 명의 멤버는 출산과 함께 현장을 떠났다. 어영부영 어떻게든 끌어보려 했지만, 이미 기울기 시작한 배를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사업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애즈원' 공동체의 철학을 표방했지만, 정작 그 본질을 체득하지 못한 채 이론만 여기저기 가져다 썼다. 그 부작용은 처참했다. '진솔하게 마음을 나눈다'는 명분은 서로를 할퀴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다. 이성을 배제하고 감정이 시키는 대로 쏟아내는 말들이 '솔직함'으로 포장되어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겼다.
공동체의 중심을 잡아야 할 리더는 책임을 회피했다. "우동사에 리더가 어디 있어, 다 똑같은 구성원이지"라는 말 뒤로 숨어버린 것이다. 반야 스쿨 과정에서 감당하기 힘든 문제가 터지자, 리더는 결국 완전히 숨어버렸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소통을 거부하는 리더를 보며 공동체의 근간이 무너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 무렵의 나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스스로 '짐승 같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만큼, 이성적인 판단을 놓아버린 채 본능과 욕망에만 충실했다. 먹고 마시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쫓아다니며 정작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의무와 판단은 외면했다. "사람은 원래 이래도 되는 거야. 다정한 사회는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들면 돼"라는 말로 나의 비겁한 욕망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면서 말이다.
코로나19는 결정타였다. 어떤 공동체는 위기 속에 더 단단해졌지만, 우동사는 반대였다. 코로나 끝물에 멤버들이 집단 감염되면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더 멀어졌다. 늘 열려 있던 각자의 집 문이 굳게 닫혔다. 오래된 멤버들이 하나둘 다른 동네로 이사를 나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곳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아, 망했구나. 이제 새로운 곳을 찾아보자." 이 쉬운 결론이 왜 그때는 내려지지 않았을까. 나에게는 우동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절대 놓을 수 없다는 지독한 집착과 애착이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내 것'이었고, 내가 지켜야 할 '내 자리'였다. 내가 애쓴 시간, 내가 쏟아부은 청춘이 너무 커서 그것이 부정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즈음 먼저 '오늘 공동체'로 이주한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는 그곳의 이야기를 드문드문 들려주었다. 매력적이었다. 특히 우동사에서 우리를 괴롭혔던 그 지독한 갈등들을 그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친구의 초대로 방문한 도봉의 '오늘 공동체'. 그곳에서의 저녁 식사는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가장 놀라웠던 건 아이들이었다. 공동체의 아이들이 처음 보는 내가 있는 테이블로 스스럼없이 다가와 "이모, 이거 어떻게 먹는 거예요?"라며 맑은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우동사의 아이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낯선 사람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거나, 아니면 늘 울고 짜증을 내던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며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아... 정말 되는 곳이 있구나. 가능한 일이었구나.'
가슴 밑바닥에서 떨림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장 짐을 싸지 않았다. 아니, 쌀 수 없었다. 여전히 미련이 남은 나는 리더인 친구를 붙잡고 "마지막으로 우동사를 바꿀 프로젝트를 한 번만 더 해보자"고 매달렸다.
무너져가는 성벽 위에서 나는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집착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십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 새롭게 해야한다는 게 두려웠다. 10년이 넘게 있었는데 그래도....라는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나를 눌러앉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