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해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깨고 만든 새로운 지도

오늘공동체 공동체학교: 모호함에서 명확함으로

by 윤희크

1. 새로운 지도의 시작: 모호함에서 명확함으로

새로운 공동체인 ‘오늘공동체’에 발을 들이며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1년이라는 시간이었다. 이곳의 일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동체 학교' 1년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과거 '우리동네사람들(우동사)'에서 보낸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1년이라는 조율의 시간이 얼마나 필수적인지 절감한다.

공동체의 가치와 규칙은 어렴풋한 짐작이 아니라 날카로울 만큼 명확해야 한다. "원래 이래"라는 고인물들의 관성이나,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뜨거운 뭉뚱그림은 공동체를 서서히 변질시킨다. 명확한 규칙이 부재한 곳에서 텃세와 소외감이 싹트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이상적인 환상이 아닌, 책임과 약속이라는 현실의 지도를 먼저 펼쳐 들기로 했다.


2. 낡은 지도를 버리다: 사랑은 감정이 아닌 '의지'

공동체 학교의 첫 수업, 필수책은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이었다. 서른 살, 생애 첫 정신과 상담에서 선생님이 내주셨던 숙제 같은 책을 여기서 다시 만난 건 뭔가 내게 계시처럼 느껴졌다.

책은 말한다. 사랑은 첫눈에 반하는 감정적 끌림이 아니라, 서로의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대하는 '의지'라고. 이 공동체는 그 정의를 지독하리만큼 실천하고 있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밀고 나가지 말고, 끊임없이 성찰하며 새로운 지도를 그려내라"는 격려. 그것은 어른이 되어 다시 배우는 '약속의 무게'였다. 생업을 제외한 그 어떤 핑계도 허용되지 않는 1년의 몰입, 그것은 가벼운 호기심이 아닌 삶을 재편하겠다는 결단이었다.


3. 피해자 서사에서 벗어나 마주한 현실

많은 심리학 책들이 '나쁜 타인'에게 상처받은 '가여운 나'를 위로할 때, 공동체 학교는 정반대의 길을 가리켰다. 타인과 살아갈 때 내가 저지르는 폐해, 나의 비대해진 자기애가 누군가에게 주는 피해에 주목하라고 했다.

이 지점은 내게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을 주었다. 이전 공동체가 흩어지는 과정에서 나는 '억울한 피해자'라는 프레임에 갇혀 눈물을 얼마나 흘렸던가. 나빼고 다 나쁜놈들이었다. 하지만 1년의 과정을 통과하며 비로소 깨달았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였음을. 억울함과 슬픔을 구분하기 시작하자, 나를 짓누르던 우울의 안개가 걷혔다. 나 자신의 깎여야 할 부분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가장 강력한 치유였다.


4. 지속 가능한 '함께 살기'를 위하여

우리는 흔히 "약속했으면 무조건 지켜야지!"라며 분노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배운 인간에 대한 이해는 조금 더 입체적이다. 인간은 한 발 나아가다 두 발 뒤로 물러나기도 하는 한계투성이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약속 지켜!"라고 옭아매는 대신, 실패한 상대에게 사과받고 다시 함께 나아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

오늘공동체 사람들이 내뿜는 밝고 가벼운 에너지의 근원은 낙천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치열하게 규칙을 세우고, 보편적 가치를 지켜내려는 처절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지도를 그린다. 이 지도는 아름다운 풍경화가 아니다. 갈등을 다루는 매뉴얼이 적혀 있고, 나의 한계가 명확히 표시된 실용적인 지도다. 이상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을 붙잡기로 한 나의 선택이, 이 공동체 안에서 더 깊고 오래 머물 수 있게 해주리라 믿는다. 계속 해서 지도를 그려나가고 걸어나가고 싶다.

이전 11화다시 사람들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