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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Mar 13. 2020

백육만분의 일의 이야기

공무원 회상기  #1


나는 공무원이었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의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전체 공무원 현원은 1,060,632명이었다.<출처-2018년 인사혁신통계연보> 당시에는 나도 그 백육만 명 중의 하나였다. 공무원에는 한눈에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직종, 직군, 직렬 그리고 직급이 존재한다. 대통령도 선거로 취임하는 정무직 공무원이며 검사도 담당 직무의 특수성을 인정하기 위해 별도로 분류한 특정직 공무원이다. 등대지기도 수많은 일반직 공무원 중의 하나인 등대관리직 공무원이다. ‘직업이 뭔가요?’라는 질문에 나는 대충 공무원이라고 답해왔지만 정확하게는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서울시 자치구 소속 지방행정직 공무원으로 구청과 동주민센터에서 행정업무를 보고 있어요.’라고.


단순히 공무원이라고만 알고 있던 사람이 법원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적이 있다.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만날 때마다 내심 직업적 친밀감을 느껴왔다.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직업이라는 동질감이었다. 그런데 근무처를 알게 되니 소속과 업무가 다르다는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법원에서 일을 하는 건 구청이나 주민센터에서 일하는 것과는 다르겠지? 법원직이면 많이 뽑지도 않고 시험 준비도 더 어려우니 행정직보다는 훨씬 전문적일 것 같아.’ 혼자 이런저런 추측을 하다가 실제로 그 사람의 경험담을 듣기 전에 내가 알 수 있는 건 많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공무원이라고 다 같은 공무원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런 이유로 나의 공무원 회상기가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대표할 수는 없다. 전체가 아니라면 주로 도청, 시청, 군청, 구청, 읍면동사무소에서 일하는 지방 공무원의 이야기만이라도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 또한 어렵다. 근무 지역의 특성, 업무의 다양함, 직급의 높낮이로 인한 분위기 차를 감안해야 한다. 하물며 같은 주민센터에서 일하더라도 민원대에서 증명 발급을 담당하는 직원이 사회복지나 민방위 같은 업무의 구체적인 시스템이나 세세한 고충까지 알지 못한다. 결국 내가 전할 수 있는 것은 백육만분의 일, 나의 이야기뿐이다.


그만둔 지 2년이 지나 실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전달하기도 힘들다. 그 사이에 법과 정책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주민센터에서 전입을 신속하게 하는 법이나 미비한 구비서류로 어떻게든 증명서 발급받는 법 등의 실용적인 글은 실무를 보고 있는 현직 공무원들에게 양보하겠다. 직접 겪은 사실에 근거하지만 객관성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여러 사건과 인물들이 서로 합쳐지고 각색되어 주관적인 시각으로 편집될 것이다.  


판사나 검사, 정부부처 사무관의 성공스토리처럼 폼 나지도 않는다. 공무원으로서 나의 서식처는 구청 혹은 동마다 꼭 하나씩 있는 주민센터였다. 새로 치자면 비둘기 같이 친근한 느낌이랄까? 9급으로 들어가 7급을 달고 나서 의원면직을 했기 때문에 '나 때는 말이야~.' 하고 말단에서 고위 공무원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으스대며 말할 수도 없다. 





공무원이라는 집단을 대표하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멋있지도 않은 이야기라면 왜 굳이 이 글을 써야 할까?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 위해 시간이 걸렸다. 힘들게 얻은 자리에서 버티기 위해 끝까지 애를 쓴, 그 과정 속에서 다른 꿈이 생긴, 그래서 그곳을 그만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본격적으로 글을 쓸 용기가 생겼다.


웰빙(합격 당시 최대의 유행어였다)을 꿈꾸며 입성한 공무원 사회에서 마주한 현실과 씩씩한 척 일했지만 하루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무서웠던 날들에 대해 적을 것이다.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일 앞에서 얼마나 꼴사납게 주저앉았는지도 솔직하게 보여줄 것이다. 참다못해 엉엉 울어버린 날, 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뿌듯했던 날이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럴듯한 말 뒤에는 언제나 진짜 고백이 있다. 공무원 재직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둔 나는 연금을 받지 못한다. 그동안 쌓아 올린 호봉도 사라졌다. 다른 곳에 취직할 수 있는 경력도 되지 않는다. 남은 게 있다면 오직 이야기뿐이다. 이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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