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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Mar 20. 2020

기필코 사무적일 것

공무원 회상기 #2



사무적(事務的)

1. 사무에 관한. 또는 그런 것.
2. 행동이나 태도가 진심이나 성의가 없고 기계적이거나 형식적인. 또는 그런 것.

                                                                                                                                  -표준국어대사전



“...... 나는 지금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공무원처럼 사무적으로 넘기고 있다.” 

취향에 맞는 책을 발견했다. 기쁜 마음에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다 툭 튀어나온 한 줄에 걸려 멈췄다. 감성적인 문장 사이에서 이 부분이 유난히 건조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공무원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무적이라는 표현이 공무원이란 단어와 나란히 놓이면 중립에서 부정으로 살짝 방향이 기운다. 나도 모르게 무표정한 얼굴과 흐린 눈빛으로 타자를 치는 모습이 떠오른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대신 나는 얼마나 사무적인 공무원이었는지 뒤돌아봤다.


가족관계나 등본 같은 증명서 발급은 한눈에 봐도 매우 사무적인 일이다. 해당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고 서류를 출력해서 민원인에게 건넨다. 발급이 까다로워지는 경우의 수가 많지만, 기본만 따지자면 기계적이고 단순한 업무가 맞다. 서류를 넘기기 전, 한번 더 맞게 출력됐는지 확인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 끝까지 사무적일 것. 자칫하다가는 인생을 보게 된다. 한 장의 종이 위에서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다. 결혼하고 이혼한다.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또 아이를 낳는다. 이사를 하고 국적이 바뀌기도 한다. 함께 있다가 혼자 덩그러니 남기도하고 혼자 있다가 다시 누군가와 합쳐지기도 한다. 







“안녕하세요. 어떤 업무를 도와드릴까요?” 

환하게 인사하며 한 민원인을 맞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사망 신고하러 왔습니다.” 

사망신고 자체는 주민등록과 가족관계 전산에 모두 입력을 해야 되기 때문에 단순 발급보다 처리 시간은 더 걸리지만 까다로운 업무는 아니다. 하지만 어떤 업무보다 사무적이 되어야 한다. 사망신고라는 소리에 밝은 미소를 황급히 집어넣었다. 사망진단서와 신고서 그리고 신고인의 신분증을 받아 들고 눈동자가 큰 진폭으로 떨렸다. 젊은 자녀의 죽음을 신고하러 온 아버지였다. 예의 바르게 그리고 정확하고 신속하게 사망신고를 처리하는 일이 그 순간 내가 자식을 잃은 부모를 위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람은 공감의 동물이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어설프게 슬픔의 티를 내는 것은 오히려 민원인에게 실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분하고 상냥하게 서류작성과 신고 절차를 안내했지만 감정이 너무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했다. 주민등록 전산에서 사망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은 또 다른 고비였다. 만약 사무적일 필요가 없다면 앳된 사진 앞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싶었다. 마음속 애도와 사무적인 업무처리의 균형을 잡으려 한참 애를 썼다. 접수처리가 완료됐다. 서류 위, 한 사람의 인생이 마감됐다.


오랫동안 거주지 없이 떠돌아 주민등록상 거주불명 등록 처리가 된 노숙인 아저씨가 민원인으로 왔다. 그는 오래돼서 사진이 바래고 때가 묻어있는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재등록을 하러 왔다고 했다. 몸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와 정반대의 수줍은 말투였다. 기존 사진의 입력날짜는 십 년 전. 삶이라는 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금과 다른 얼굴이었다. 온갖 풍상을 거쳤을 그의 지나온 날들에 대한 연민이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으면 얼굴이 딴사람이 되어버렸어요.’ 하마터면 속마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사무적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발휘해서 대신 이렇게 입을 열었다. 

 “마침 잘 오셨어요. 요즘 주민등록 사실조사 기간이라 재등록 과태료가 기본으로 50% 감면되는데 다행이네요.” 

민원인은 모르고 왔는데 잘됐다고 기뻐했다. 내 사무적인 자세가 완벽하지 않았는지 하는 일이 자꾸 안 풀려서 거주불명 등록이 되어버렸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재등록 업무가 완료됐다. 서류 위, 민원인의 삶도 되살아났다. 아저씨는 임시 신분증을 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나도 같이 웃었다. 


사무적이기 위해 항상 기를 써야 하는 건 아니다. 가끔 기꺼이 사무적인 태도를 내려놓아야 하는 시간도 있다. 추운 날, 치매로 길을 잃고 주민센터로 도움을 청하러 온 할아버지에게는 금방 가족이 찾으러 올 거라고 안심시켜드린다. 청각이 좋지 않은 할머니에게는 큰 소리로 천천히 설명해드린다. 주민등록증을 처음 발급하러 온 고등학생이 떨지 않도록 농담을 하며 지문을 찍는다. 관공서 자체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친근한 응대로 긴장과 경계가 가득했던 눈빛을 안도하게 만든다. 단, 이렇게 마음을 열어야 하는 순간이 지나면 바로 사무적인 태세로 돌아가야 한다. 마음에는 한도가 있어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연을 다 담아내면 과부하가 걸린다.  







사무적인 공무원이란 영혼이 없는 책상의 일부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무적이란 단어는 공무원에게 복잡한 법과 절차에 골머리를 썩이면서도 민원을 해결하는 힘이 되어준다. 막말을 들으면서도 버텨내게 한다. 비누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사람이건 땀 냄새가 나는 사람이건 누구든 공평하게 대할 수 있게 한다. 방금 다녀간 민원인의 복잡한 가정사에 호들갑을 떨지 않게 한다. 진상 민원의 욕설과 폭력에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져도 멈추지 않고 벨을 누르면서 민원을 처리하게 한다. 


사무적으로 일하는 데 성공한 날은 감정 소모를 덜하고 덜 지쳤다. 애석하게도 나는 자주 미소 짓고 꽤 친절했고 종종 마음 아팠다. 잠깐 스치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했고 그들이 흘리고 간 인생의 작은 조각들을 오래 기억했다. 그래서 공무원 생활 내내 더 사무적이려고 노력했다. 공직생활을 끝까지 해낼 비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사무적인 시간은 대부분 마음에 남지 않고 곧바로 사라졌다.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들은 사무적이지 못했던 시간이다. 기억의 선명도로만 시간의 가치와 의미를 따지자면 사무적이지 못했던 시간이야말로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적이려고 안간힘을 썼던 그 시절의 내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나는 말할 것이다. '사무적으로 일해, 더 철저하게 사무적으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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