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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Mar 27. 2020

떡을 사랑하는 그대에게

공무원 회상기 #3

자다가도 ‘떡’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눈이 번쩍 떠질 만큼 떡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마침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노량진으로 안내하고 싶다. 지방직 공무원으로 일하면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못해도 떡은 원 없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떡이 없는 공무원 생활, 그것은 내게 산소 없는 지구와도 같았다. 


떡이 아니라도 주민센터에서 일하면 먹을 게 많이 생긴다. 잔치 때마다 새마을 부녀회원님들이 부쳐주는 고소한 부추전을 먹을 수 있다. 꼬들꼬들한 편육, 새콤한 홍어 무침도 빠지지 않는다. 복날이면 삼계탕을 먹으러 간다. 인심 좋은 동장님을 만난다면 꼭 특별한 때가 아니어도 점심을 얻어먹는다. 동장님이 관내 순찰을 돌 때 가끔 사 오는 핫도그랑 고로케도 꿀맛이다. 큰 행사를 치르면 고생했다고 노조에서 치킨과 피자도 보내준다. 통장님이 직원들 수고했다고 사다 주시는 만두나 옥수수도 있고 겨울이 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귤도 자주 보인다. 다른 부서에서 인사 오는 직원들이 사 오는 롤케이크도 먹을 수 있고 분위기가 훈훈한 곳이라면 늦은 오후, 떡볶이와 순대로 간식타임을 즐기기도 한다. 직원들이 여행을 다녀오면 작은 과자를 돌린다. 명절에는 참기름과 김, 통조림 선물세트를 받기도 한다. 적고 나니 내가 무슨 정신으로 이렇게 좋은 직장을 그만뒀을까 싶을 정도다. 다양한 음식의 향연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먹은 것은 단연코 떡이었다. 









백설기, 절편, 바람떡, 송편, 꿀떡, 기장떡, 인절미, 카스테라설기, 영양떡 등등 온갖 떡을 먹을 수 있다. 신규공무원은 6개월간의 시보 생활을 거친다. 이 기간이 끝나야 정식으로 임용을 받는다. 시보를 떼는 중차대한 날, 백일 떡이나 돌떡처럼 기념 떡을 준비해서 사무실에 돌린다. 쿠키나 피자로 대신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아직은 떡이 대세다. 각종 행사에도 떡은 필수 요소다. 특히 인사철은 집중적으로 떡을 먹을 수 있는 시기다. 기존 부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인사이동을 한 직원들에게 음료수와 떡을 들고 응원 방문을 한다. 승진자에게 축하의 의미로 떡을 보내기도 한다. 


한 종류의 떡이 유행하는 일도 흔하다. 여러 명이 동시에 인사가 나는 바람에  손님이 연달아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가지고 온 떡이 다 똑같은 웃지 못할 일이 생긴다. 삼일 연속 같은 떡을 먹어 그 맛이 혀에 영원히 각인되어버린 떡도 있다. 그 지역에 괜찮은 떡집은 한정되어 있고 어느 떡이 맛있다고 하면 여기도 그 떡, 저기도 그 떡을 시키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어느 조직에나 창의적인 사람은 있다. 기존의 인기 떡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정보에 귀를 기울여 미지의 떡을 시키는 선구자들. 연속해서 인절미만 먹다가 처음으로 밥알 찹쌀떡을 맛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떡을 고른 사람의 센스에 두 손 모아 감사했다. 


떡이 넘쳐나는 풍요의 직장이지만 퇴근을 하면 떡과 이별 아니냐고? 아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떡이 솟아나는 곳이다. 남은 떡을 소분해서 집에 가져가라고 나눠주기도 한다. 집에 가족이 있다면 떡뿐만 아니라 공무원 사회의 정까지 같이할 수 있다. 


당신이 만약 진정으로 떡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일 출근해서 어떤 떡을 먹을 수 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잠을 청할 것이다. 진상 민원인에게 영혼의 마지막 한 톨까지 탈탈 털린 직후라도 떡 한 덩이에 다시 웃을 수 있겠지. 사무실에 떡이 생기면 가장 먼저 탕비실로 달려가 솔선수범하여 떡을 접시에 옮겨 담을 것이다. 환하게 웃으면서 직원들 사이를 ‘떡 드세요!’ 하고 외치며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묵직한 떡 봉투를 소중히 품에 안고 뿌듯한 마음으로 퇴근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떡을 프라이팬에 구워 조청에 찍어 먹을 생각에 가슴 두근거릴 것이다. 









그게 빵이었다면 하고 상상했다. 에쉬레 버터가 들어간 크루아상이나 국내산 팥으로 만든 앙버터 바게트, 커스터드 크림이 가득한 슈나 소금과 버터가 잘 어우러진 버터 프레첼이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아무리 험난한 공직 생활의 파도가 내 몸을 멀리멀리 밀어내도 기를 쓰고 그 자리에 닻을 내리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상상. 


10년 넘게 무수히도 많은 떡을 먹었지만 떡에 대한 사랑이 한결같은 공무원을 알고 있다. 아침 식사를 떡으로 먹고도 사무실에서 떡이 나오면 신나서 또 떡을 먹는 사람. 길을 가다가 떡집 앞에서  ‘저 떡 맛있겠다.’ 혼잣말을 하는 사람. 어려운 업무와 반복되는 야근에도 군말 없이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다. 그를 보며 생각했다. 나와 달리 정년퇴직을 향한 무난한 항해가 보장된 사람이구나. 어쩌면 모든 것이 떡 때문인지도 모른다. 떡의 세계에서 목 메어 가슴을 치다가 그 세계를 탈출한 빵순이, 그게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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