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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Apr 03. 2020

상상과 현실의 간극

공무원 회상기 #4

“선생님,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옆에서 바로 발급해서 올게요.” 

안절부절못하면서 사정했다. 

“아, 진짜 서류 하나 떼는데 나보고 얼마나 기다리라는 거야?” 

화가 잔뜩 난 민원인의 대답에 안 그래도 움츠러들 때로 작아진 몸이 움찔했다. 진작부터 목덜미가 딱딱해지고 식은땀이 나던 참이었다. 얼굴이 물파스를 바른 것처럼 화끈거렸다. 


민원서류 발급 장치가 말썽이었다. 등본이 기계 사이에 끼어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민원대에 앉아있던 직원들에게 골고루 분산되던 사람들의 눈빛이 일순간 멈췄다. 지루하거나 혹은 초조하거나, 애가 타거나 혹은 화가 난 시선이 이내 내 얼굴을 향해 하나로 모였다. 보이지 않은 그 끝이 얼마나 날카롭던지 등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웅크린 모양새가 되었다. 


두 명이 같이 쓰고 있는 발급기가 멈춰버리자 순식간에 민원 대기석이 꽉 찼다. 여기 일하는 사람 없냐고 난리가 났다. 낡은 기계는 자주 말썽을 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그제야 책상 뒤에 가려져 있던 팀장님이 일어나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사색이 돼서 기계를 두드리고 있는 나와 동료의 귀에 ‘왜 이런 걸로 신경 쓰게 만드는 거야?’ 혼잣말인지 우리를 향한 질타인지 알 수 없는 팀장님의 말이 들렸다. 서운할 틈도 없다. 그냥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오후 5시가 가까이 되니 민원의 흐름이 확 줄었다. 긴장이 풀리자 두통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미간을 아무리 찌푸려도 모니터의 글씨가 선명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구 전체를 통틀어서 인구가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동이다. 결원이 생겼는데 충원이 아직 되지 않은 데다 신규 아파트 단지 전입까지 겹쳤다. 사무실을 지키는 최전방에 앉아 고개도 들지 못하고 열심히 벨을 눌렀다.


사무실은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웠다. 내 자리에서 출입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골목만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맞은편 세탁소 앞에 걸려있는 옷들이 바람에 자유롭게 흔들렸다. 그 광경을 바라볼 때면 나는 누군가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다. 


'잘 들어봐. 공무원만 되잖아? 그럼 니 인생은 이제 걱정이 없는 거야. 월급도 나오고 연금도 나오고, 무엇보다 편하게 일할 수 있다고. 너도 봤지?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그 글 말이야. 9급 공무원의 웰빙라이프. 조금 일하고 조금 벌고 칼퇴 후에는 운동도 하고. 그래도 집에 돌아오면 시간이 남을걸?'


누가 말해준 적은 없지만 나는 그렇게 믿었다. 이런 시대에는 공무원이 짱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동사무소를 가려면 좁은 골목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야 했다. 주민센터 자체를 방문하는 일이 손에 꼽혔다. 다른 사람도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 곳이라면 조용히 일할 수 있을 거라고 내 기억만으로 단정 지었다. 공무원 시험을 보기 전에 사기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한 적이 있다. 원피스를 입고 구두를 신고 시내에 있는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다. 얌전하게 책상 앞에 앉아 보고서를 작성하고 5시 반에 퇴근해서 요가를 했다. 짧은 경험만으로 모든 사무직은 그렇게 일을 할 거라고 여겼다. 


풍문과 기억과 경험만으로 나는 허상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차분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안정적이고 한적한 공간,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월급을 받는 편한 직장.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그 허상은 더 안락하고 더 평화롭게 다듬어졌다. 돈을 번다는 일의 기본적인 어려움조차 잊어버렸다.


처음 동주민센터에서 근무를 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받아들여야 했던 것은 상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주는 충격이었다. 사무실은 시끄러웠고 가끔 큰소리가 난무했다. 무거운 짐을 나르고 쌓인 눈을 삽질하면서 동사무소 업무의 버라이어티함에 놀랐다. 지방행정직 공무원은 순도 100%의 사무직이 아니라는 사실에 당황했다. 내 앞에 밀려드는,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직원과 민원 모두) 무서웠다. 






내가 상상했던 직장은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누가 날 속였을까? 나를 속인 건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욕심에 앞으로 내가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단지 나의 상상과 달랐던 것뿐 그게 현실이었다. 임용을 받기 전 3주 동안 인재개발원에서 신규자 교육을 받았다. 나는 젊었고 이제 공무원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지금을 즐기세요. 이 순간이 앞으로 여러분의 공무원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입니다.” 

귀담아듣지 않았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상황은 변하고 있다. 개별적으로 따진다면 좋아진 점도 나빠진 점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는다. 노후된 주민센터는 신축되고 새로운 업무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동의 인력도 증원되는 추세다. 말도 안 되게 무례했던 사람들도 10년 전에 비해 적어졌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나라와 국민의 수준이 나날이 높아지는 변화를 체험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상상과 현실의 간극으로만 느꼈던 그것이 바로 밥벌이라는 것이다. 세금을 월급으로 받는다는 것이고 어른이 된다는 것이었다. 직업인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세월과 함께 맑았던 얼굴은 칙칙해지고 총명하던 눈빛 또한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어떻게 계속 빛날 수가 있겠어?


내가 일하던 오래된 주민센터가 곧 다른 위치에 새로 지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누구도 내가 앉았던 그 자리에서 세탁소 앞 나부끼는 옷을 바라보며 괜히 공무원이 됐다고 억울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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