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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Apr 10. 2020

행복한 공무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운

공무원 회상기 #5

공무원 세계에 입성하고 마주친 현실에 당황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에는 내가 열심히만 한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믿었다. 힘들게 공무원이 된 만큼 의욕이 충만했다. 국민과 정부를 잊는 다리 같은 존재가 되겠다며 신규공무원의 다짐을 당당히 글로 쓴 적도 있다. 표현이 진부해서 그렇지 진심이었다.


최선을 다하면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운칠기삼(運七技三). 목표한 바가 잘 풀리기 위해서는 운이 7할이고 노력이 3할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날이 늘어갔다. 어떻게 보면 다소 맥이 빠지는 말이지만 들어맞을 때가 많았다. 정년퇴직까지 무탈하고 행복한 날을 보내겠다는 야망은 온전히 본인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주의 기운이 나를 도와야 한다. 축복받은 공무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운을 꼽아봤다.




첫 번째는 보직운이다. 보직이란 특정 직무의 담당이 되는 것을 말한다. 어디에 발령이 나고 무슨 업무를 맡느냐에 따라 직업생활의 질이 좌우된다. 공무원에게 발령은 한마디로 미지에의 초대다. 보통 한 곳에서 2~3년을 근무하게 되므로 다음 발령이 언제 나겠구나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발령장을 받아 드는 순간까지 어디에서 일하게 될지는 모른다. 물론 개중에는 능력이 출중해서 특정부서에 발탁되거나 인맥으로 본인이 일할 근무부서를 협의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긴 있다. 그런 소수의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은 행여라도 힘든 곳에 배정되는 불운이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발령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내가 근무했던 동을 예로 들어보자면 인구가 3만 6천 명이었다. 가장 작은 동은 1만 4천 명으로 인구가 2.5배 이상 차이나지만 공무원 정원 차이는 2명에 불과했다. 물론 직원 외에 업무 보조를 해주시는 분이나 공익의 수가 몇 명 더 많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업무강도의 차이를 줄일 수는 없다. 똑같은 민원업무를 해도 어디서는 여유가 있는 반면에 다른 곳에서는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면서 일을 하는 상황이 생기는 이유다.


구청도 부서마다 격차가 있다. 여러 과가 한 공간을 같이 쓰는 통합사무실에서 6시가 되면 그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르르 칼퇴를 하는 과가 있는가 하면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과도 있다. 하늘이 보우해서 무난한 곳에 발령이 난다고 해도 만사가 형통하는 것 아니다. 격무부서에도 그나마 나은 업무가 있고 선호부서에도 고된 업무가 있기 마련이다. 








두 번째는 승진운이다. 우선 언제 임용됐는지에 따라 출발선이 달라진다. 나는 서울시 공무원을 역대급으로 많이 뽑은 해에 합격했다. 그 덕분에 공무원이 됐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기가 많은 만큼 승진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리가 승진하는 시기와 맞물려 기능직이 상당수 전직시험을 통해 일반직으로 전환을 했다. 승진 경쟁이 더 치열해졌다.


승진에는 공표된 기준이 있다. 그렇다고 승진 발표가 항상 납득되는 것은 아니다. 승진자 명단이 나오면 직원들은 한데 모여 그 결과에 대해 분석한다. 실력이니 빽이니, 어부지리니 지연이니 하는 말이 입에 오르기도 한다. 열띤 토론에도 승진의 세계는 그 비밀을 쉽사리 보여주지 않는다. 대게  ‘그래, 승진도 역시 운이지.’라며 자조적인 어조로 논의는 끝맺음된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고 말하지만 믿어달라. 난 확실히 운이 없었다.

두 개 동에서 근무했는데 하필 둘 다 인구수 1~2위를 다투는 곳이었고 구청에서는 무난한 과로 발령이 났지만 귀에 딱지가 앉도록 욕을 듣는 기피업무를 맡았다. 요즘 8급 승진은 빠르면 1년 반 늦어도 2년에는 하던데 나는 8급을 달기까지 3년 1개월이 걸렸다.








이런 내게도 한줄기 빛이 있었다. 대직자운이다. 나는 상사운보다 대직자운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공무원은 대직시스템이 필수다.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대신 일을 처리해주며 보통 옆자리에 앉아 긴 시간을 같이 하는 짝이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상사는 잠시 잠깐 견뎌내면 되지만 대직자가 이상하면 온 하루가 괴롭다. 다른 복이 없는 탓에 잘 나가는 공무원이 되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지만 휴직 기간 포함에서 8년이나 공무원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람이었다. 좋은 짝을 많이 만났다. 주위에서 책임감 없는 대직자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례를 여러 번 목격한 후 내가 누렸던 친밀하고 안정적인 관계가 큰 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 가지 운을 모두 다 점지받은 운빨 충만한 공무원이 있다면 진심으로 부럽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어떡하죠? 난 이 세 가지 운이 다 없는데.’라는 공무원이라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길 바란다. 운이 좋지 못해 가끔 탈이 나고 불행한 기분이 시달렸지만 나도 승진운과 보직운이 없어서 공무원을 그만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운이 7할이라는 말 뒤에 숨어있는 3할의 노력을 잊으면 안 된다. 밀려드는 고난 앞에 한탄하지 않는 많은 공무원을 봤다. 운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묵묵하게 해야하는 일을 완수하는 사람들 앞에서 사사건건 운을 탓하며 비관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일은 보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으로 인내하는 그들에게 배웠다. 무탈하고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다. 축복받지 않아도 괜찮다. 3할의 노력으로 성실하게 오늘을 버텨내는 모든 이들이 언젠가 넘치는 행운으로 보답받을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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