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고로호 Jun 10. 2020

내 인생의 사회복무요원

공무원 회상기 #12

아빠가 연명치료 거부 등록을 한다고 해서 같이 건강보험공단을 찾았다. 넓은 사무실, 직원들은 파티션 너머 각자의 컴퓨터 앞에서 바빴다. 젊은 청년 한 명이 입구 중앙에 앉아  ‘이곳이 맞나?’ 하고 쭈뼛거리는 민원인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 청년에게 방문 목적을 알려야만 담당자를 찾아 사무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지옥문을 지키는 케르베로스 같았다. 나는 하얗고 앳된 얼굴의 케르베로스 청년과 마주 보고 앉아 아빠가 상담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청년은 필시 사회복무요원일 것이다. 왜 그는 사회복무요원 일명 공익이 되었을까? 여기서 일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직원들과는 잘 지낼까? 퇴근 후에는 무슨 일을 할까? 나도 모르게 같이 일했던 공익들을 떠올리며 그를 곁눈질했다.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착하고 성실한 공익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특히 주민센터 업무 중에는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작은 것 하나 부탁하는 것도 눈치 보게 만들거나 제발 출퇴근만이라도 제대로 해달라고 하소연하게 만드는 공익도 한두 명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점수를 매겨보면 나의 공익운은 100점 만점에 90점 정도로 준수하다.


내 공무원 인생 첫 사회복무요원이었던 A군은 착하고 순했다. 당시 내 업무 중에 한 달에 한 번 구청에서 나오는 소식지를 행정차에 싣고 온 동네를 누비며 통장님댁에 배달하는 일이 있었다. 소식지 배달은 으레 공익이 하는 일이었지만 성격상 누군가에게 일을 부탁하는 것이 힘들어서 소식지의 소자만 봐도 가슴이 답답했다. 미안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같이 배달하러 가자고 말하면 A군은 항상 흔쾌히  “네, 주임님. 지금 나가면 되나요?”라고 대답해줬다. 이제 막 공무원이 되어 6개월간의 시보 시절을 근근이 버티고 있던 내게  “네!”라는 한 마디는 어떤 말보다 힘이 됐다.






곧이어 B군이 왔다. 1+1이 2가 아니라 0이 되는 일은 다반사다. 두세 명의 공익이 같이 일할 경우 사이가 좋지 않거나 일을 한 사람에게 미루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행히 A군과 B군은 금방 친해졌다. 공익도 복무규정이 있고 그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을 시에는 불이익이 있지만 주민센터나 구청에서 그것을 강제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나처럼 사람을 제대로 다를 줄 모르는 강단 없는 직원과의 관계에서 공익의 성실성은 온전히 그 공익 개인의 품성과 본인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B군은 성실했고 유머감각에 의리까지 있었다. 동장님 흉내를 얼마나 잘 내는지 틈만 나면 동장님 성대모사를 해서 지친 직원들을 웃게 했다. 가끔 이유 없이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뛰어나와서 막아줬다.


한창 바쁜 시기에는 웃지 못할 공익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하철역 앞에서 안전제일이나 환경보호 캠페인을 해야 하는데 이웃 돕기 바자회도 열어야 하고, 그 와중에 눈이 온다는 예보에 염화칼슘을 꺼내야 하는 일이 동시에 벌어지면 제각각 담당들이 여기저기서 공익의 이름을 불러댔다. 공무원으로서 마지막 일 년을 무사히 버티기 위해 공익운이 절실했던 나도 그 쟁탈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적이 있다. 공무원 생활 막바지에 만난 C군이 그 대상이었다. 공익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제한된 영역의 보조적인 업무에 지나지 않지만 그 도움이 나는 꼭 필요했다.


C군은 원래 내 자리 근처에서 서류 정리와 우편물 발송 준비를 도와줬는데 사무실 구조가 변경되면서 멀리 다른 팀 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기존 업무에 새로 옮긴 팀의 업무까지 더해져서 바빠진 그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는 핑계고 나 자신을 위해 팀장님께 사정해서 그를 원래의 자리로 데려왔다.(물론 본인의 의사를 반영했다) 공무원의 때가 제법 묻었지만 여전히 공익에게 일을 부탁하는 것이 어려운 탓에 나와 일적으로 잘 맞는 C군을 포기할 수 없었다. 공무원 생활을 통틀어 주위 신경을 쓰지 않고 수완이라고 불릴만한 것을 발휘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거 꼭 지금 해야 해요? 다른 애들 시키면 안 돼요?”라는 대답에 자존심을 굽히며 사정하지 않아도 되는 점 자체만으로도 C군의 존재가 감사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사무실에서 “주임님, 여기는 진짜 너무 힘든 것 같아요.”라고 조용하게 위로를 건네는 상냥함에 감동받았다. 그의 도움으로 무탈하게 내가 먼저 공무원을 그만두고 한 달 정도 있다가 그도 소집해제를 했다.






이 글을 쓰면서 사회복무요원 헌장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헌장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우리들의 소중한 마음을 모아 사회를 밝히는 희망의 등불이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이 헌장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일하는 사회복무요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만난 세 명의 공익은 자신도 모르게 이 헌장을 실천하고 말았다. 소중한 마음을 모아 한 공무원의 발길을 밝혀주는 희망의 등불이 됐다. 나는 그들의 공익 생활을 밝혀줬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그들을 대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내가 그들의 짐을 덜어줬는지는 모르겠다. 대신 그들을 내 인생의 보물 같은 공익으로 여기며 두고두고 칭송하고 있다.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사회복무요원을 볼 때마다 진심으로 그 세 명이 어디서 무엇을 하던 행복하길 빌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험담은 나의 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