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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Jun 30. 2020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요?

공무원 회상기 #14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나는 자주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작은 키, 동그란 얼굴에 큰 눈, 상냥하지만 흐릿한 말투, 자신 없이 굽은 어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 체구, 공격력 제로의 구부정한 자세로 직장 내에서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 호감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러나 일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주민센터 민원대에 젊은 여성, 젊은 남성, 나이 있는 여성, 나이 있는 남성이 앉아있다면 상대적으로 젊은 여성이 제일 만만하게 보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작은 몸집, 순해 보이는 인상의 젊은 여자 직원이라면 바로 당첨이다. 보통 주민센터에는 따로 안내데스크가 없다. 처음 방문한 민원인이 어떻게 민원을 봐야 하나 애타게 직원들을 스캔할 때 그 레이다망에 내가 자주 포착됐다. 정문 가까이 위치한 자리 탓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미심쩍었다. 바로 옆 창구에 눈에 띄게 복지상담이라고 적혀있는데도 내게 복지 관련 질문을 던지고, 굳이 비어있는 창구를 두고도 민원을 보고 있는 내쪽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남자가 되기는 불가능하니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방법을 택했다. 앞머리 때문에 어려 보이는 것 같아서 앞머리를 길러 없앴다. 그 뒤에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중에는 눈썹을 진하게 그리고 입술을 최대한 붉게 바르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었냐고? 효과가 있었다면 한창 사무실에서 일할 시간인 한낮에 카페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열심히 눈썹을 그릴 때마다 눈두덩이에 빨간 아이섀도를 바른 금자씨가 “친절해 보일까 봐”라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것마저 아침부터 시끄러운 주민센터에서 한바탕 난리를 겪고 나면 눈썹은 다시 반토막이 되고  입술도 하얘지고 말았다. 그래도 출근 전 눈썹을 그리고 입술을 바르는 행위 자체가 나를 지켜줄 주문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눈썹을 진하게 그리는 것보다는 싹 밀어버리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꽤 진지했다.









외부 민원, 내부 직원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대할 때 중요한 건 기싸움이다. 만만해 보이는 외모는 어쩔 수 없다고 치자. 하지만 기마저 세지 않다니 타고난 조건이 불리했다. 승자가 되려면 승자의 태도를 취하라는 자기 계발 관련 조언을 따라 일 잘하는 사람을 흉내내기도 했다. 등을 곧추세우고 단정하게 행동하며 최대한 말수를 줄인다. 조용하게 자신의 일을 해내는데 집중한다. 갑자기 격무부서로 발령이 나도, 대직자가 휴직에 들어가 일 폭탄이 떨어져도 호들갑 떨지 않고 자신의 흐름에 맞춰 일하는 직원들을 보면서 나도 그 사람들의 자세를 따라 했다.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어깨를 피는 것만으로 조바심이 덜하고 여유가 생기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일시적이었다. 외양에 힘을 주는 것, 조금 더 강해 보이려는 노력이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고 그 변화가 다시 자연스레 외양의 변화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이어지지 않았다. 근본적인 내면의 변화 없이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는 노력은 그냥 연기였다. 어깨를 쫙 피고 당당하게 일하는 척하다가도 큰소리를 내는 민원인과 상사 앞에서 금방 등이 원래대로 새우처럼 말렸다. 의연하게 내게 주어진 일을 해야지 다짐하다가도 부담스러운 일 앞에서는 징징대는 소리가 세어 나왔다. 태도를 모방할 수 있지만 바위같이 단단한 사람들이 가진 아우라까지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지속적으로 그런 자세를 유지하기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진됐다.


어려 보일까 봐 계속 기르던 앞머리를 큰 맘먹고 작년에 잘랐다. 짧게 자른 앞머리 아래 내 얼굴이 바보처럼 보였다. 해방감이 들었다. 이제는 바보 같아 보여도 만만하게 보여도 상관없다. 공무원을 그만둔 지금, 나는 똑똑하고 자신 있고 침착하고 유능해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눈썹을 진하게 그리거나 입술을 빨갛게 발라 조금이라도 불친절해 보일 필요도 없다.


공무원의 허물은 생각보다 두껍고 딱딱해서 의원면직과 동시에 홀가분하게 훌렁 벗어낼 수는 없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헌 옷에서 몸을 빼내고 있는 중이라 외출할 일이라고는 집 앞 편의점이 다인 날에도 나도 모르게 눈썹을 진하게 그렸다. 친구가 눈썹을 왜 그렇게 진하게 그리냐며 좀 연하게 그려보라고 조언을 해줄 정도였다. 눈썹에 힘을 빼면서 일하는 동안 매일 긴장했던 어깨의 힘도 같이 빠졌다. 이제야 겨우 허물을 거의 다 벗어간다.










습관처럼 눈썹을 진하게 그리고는 다시 면봉으로 살살 지워가다 깨달았다. 아무리 나이 들어 보이고 세 보이게 꾸며도, 혼신의 연기로 강단 있고 똑똑해 보이게 행동해도 내가 힘들었던 이유. 이 일이 싫다는 생각, 여기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내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를 흔들었다. 그런 마음이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갉아먹었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이 없었다.


높은 성벽과 두꺼운 성문으로 무장하고 성벽 위에 줄줄이 대포를 배치하고 활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사수들이 즐비해도 성 내부에서 이길 수 없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결국 지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니 나는 매일매일의 전투에서는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왜 성을 지켜야 하는지 몰랐다. 성을 버리고 떠나고 싶었다. 버티기 위한 방어에만 급급했지 나에게 달려오는 어려움들 앞에서 용기 있게 성문을 박차고 나서 먼저 공격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왜 그렇게 도망가고 싶었을까? 그 마음 자체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공무원을 그만둔 선택 자체를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일하는 동안 나 자신을 믿어주지 못했던 점은 두고두고 아쉽다. 자주 나약한 소리를 했지만 내가 맡은 일에는 책임을 다했다. 뛰어나지는 않아도 주위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일 없이 내 몫은 해냈다. 안일한 직업의식으로 공무원 전체를 욕 먹이는 사람은 되기 싫었다. 그럼에도 버티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나 자신을 다독이는 대신 나약하다고 못 미덥다고 자책했다. 나를 믿지 못하는 마음이 나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직장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일 필요가 없지만 아직도 온전히 내 편에 되는 연습은 쉽지 않다.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서 맨얼굴을 보면서 다짐한다. 오늘 하루도 내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자고. 무슨 일을 하든 어디서 일하든 나를 굳건하게 만드는 것은 나를 믿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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