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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Jul 12. 2020

철밥통의 불안

공무원 회상기 #15

철밥통. 공무원의 안정성을 빗대어 주로 비아냥거리는 의도로 사용하는 단어. 언제 적부터 쓰였는지 알 수 없는 이 촌스러운 표현대로라면 나는 별다른 일없이 정년에 도착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일이 꼬였다. 자타공인 최고의 안정성을 자랑하는 직장인데 일을 하는 순간순간 불안에 휩싸였다. 나의 불안은 어디서 기인했을까? 불안의 원인을 찾아봤다.


원인 1. 실수에 대한 두려움. 세상 어떤 일을 하든 책임이 따르지만 공익을 위한 일에서 실수가 가져올 결과는 상대적으로 무겁다. 지자체 업무의 많은 부분이 주민의 권리와 의무, 다양한 집단의 이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다른 부서에 비해 관심을 덜 받는 주민센터 민원대를 예를 들어보더라도 대충 처리해도 되는 업무는 없다. 출생사망신고, 주민등록 신규발급 및 재발급, 전입신고 및 확정일자, 인감등록 및 발급, 국적취득, 외국인 체류지 변경신고 등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재외국민 및 외국인까지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한 권리등록과 변경 그리고 서류발급이 주민센터에서 이뤄진다.


모든 업무가 다 중요하지만 민원대 신규였던 시절 가장 두려웠던 것은 인감발급 사고였다. 어디 공무원이 인감발급 사고를 내서 몇십억 단위의 배상액이 청구됐다는 이야기가 소문처럼 떠돌 때마다 바싹 긴장했다. 각 지자체별로 주민등록 및 인감담당 공무원을 위해 보험을 가입해도 배상금액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공무원 개인에게 구상권이 청구될 수 있다. 내가 일하는 곳은 붐비고 시끄러웠다. 화장실도 참아가며 쫓기듯 일을 하다 보면 정신이 없는 와중에 실수가 나올까 봐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원인 2. 비상근무와 주말근무. 지방직 공무원은 퇴근을 해도 다리 하나는 사무실에 걸쳐놓아야 한다. 문자 하나에 늦은 밤이나 새벽에도 날씨 관련 비상근무를 나간다. 막 공무원이 됐을 때 첫 1~2년간 비와 눈은 왜 그렇게 많이 내리던지.  명절을 보내러 갔다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기도 하고 주말에 놀러 갔다가 KTX를 타고  출근한 적도 있다. 당시에는 신규여서 대한민국 어디에 있든 비상이 걸리면 무조건 출동해야 되는 줄 알았다. 북한과의 관계는 왜 또 그렇게 악화일로였는지. 주민센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밤 12시까지 사무실에서 대기한 기억도 난다. 힘들게 공무원이 됐는데 전쟁이 나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그나마 행사로 인한 주말근무는 사전에 고지되니 조금 나았다.


지방직 공무원 생활을 하다 보면 비상근무와 주말근무에 금방 익숙해진다. 일과 사생활의 경계가 흐릿해져야 편하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9 to 6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일과 사생활의 경계가 확실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슴 어딘가 품고 있었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제일 좋은 건 빗소리를 마음 편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 눈이 내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뉴스에 촉각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고 미리 잡아놓은 주말 약속을 취소하지 않아도 된다.


원인 3. 잦은 인사. 보통 정기인사는 일 년에 두 번이지만 휴직과 복직 등 다양한 이유로 생기는 소폭의 인사까지 더하면 인사 변동이 자주 있다. 인적 구성도 별로인데 일까지 넘치는 힘든 때를 꾹 참고 견디다 보면 갑자기 균형 잡힌 시기를 맞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일도 익숙해지고 과장님과 팀장님도 인품이 훌륭하고 팀원들끼리도 화합이 잘되고 대직자와도 더할 나위 없이 쿵짝이 잘 맞는 시기. 이대로라면 애쓰거나 버틸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내 직업생활을 영위할 수 있겠구나 싶은 순간. 그런데 인사가 말썽이다. 발령장, 그깟 종이 하나에 갑자기 상사가 바뀌고 팀원이 바뀐다. 새로 온 고참이 기껏 익숙해진 내 업무를 가져가 버리기도 한다. 하루아침에 견고하게 보였던 균형은 무너져 내린다. 이제 막 모든 게 괜찮아졌는데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 반복된다.


원인 4. 모니터링과 감사. 공무원 업무 특성상 모니터링과 감사는 필수다. 때마다 출퇴근 점검과 보안점검, 전화 친절도 점검, 민원응대 친절도 점검, 행정감사, 자체감사, 암행으로 진행되는 서울시 감사 등등. 감시시스템의 존재 유무에 따라 평소 업무태도에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자율성이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꾸 의식됐다.


원인 5. 불특정 다수 응대. 아주 강력하게 나의 불안을 자극한 요인이지만 지난번 진상 민원 편에서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겠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은 지방직 공무원 업무의 본질이다. 많은 공무원들이 무난하게 이를 수용하며 일하고 있다. 나는 왜 유독 더 불안했을까?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알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예민함을 기반으로 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외면하려 했지만 원래는 작은 변화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격이다. 불안도가 높은 사람이다. 장기적인 안정감보다는 지금 여기에 정신을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현재의 안정감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나 같은 유형은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는 것을 큰 메리트로 느끼지 못한다.


지방직 공무원의 근무여건에 개인적으로 불안도가 높은 성격이 합쳐지니 똑같은 환경에서 일하는 다른 직원들보다 더 쉽게 불안하고 피곤했다. 머리로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능숙한 척 일했지만 불안을 자극하는 일이 벌어질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만큼은 끝내 익숙해지지 않았다. 국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 이 조직에서 하나라는 소속감 등 많은 이점에도 불구하고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 반복되니 내 직업의 단단한 기반 따위는 사라지고 그 틈새로 새어 나오는 불안에만 시선이 갔다.


직장에서의 불안은 개인 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퇴근 후에도 과민해진 자율신경이 가라앉지 않았다. 특히나 몸이 좋지 않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면 일터에서의 불안감이 고스란히 집까지 따라왔다. 안정 속에서 불안을 느끼기보다는 불안 속에서 안정을 느끼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계에 대한 불안을 짊어지더라도 일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일이 하고 싶었다.


공무원이 되기 전에는 몰랐다. 철밥통도 녹이 슬고 찌그러진다는 걸. 떨리는 두 손으로 감당하기에 철밥통도 힘에 부치게 무겁다는 걸. 망가진 밥통을 내손으로 내려놓은 지금,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이 불안 속에서 내 마음만은 전에 없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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