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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Aug 31. 2020

퇴직을 앞두고 만난 90년생 공무원

공무원 회상기 #17



구청에서 나는 35살의 나이로 팀의 막내를 맡고 있었다. 평균 연령이 높은 곳이어서 다른 팀원들과 최소 10살 이상 차이가 났다. 늙은 막내로 나름 사랑받으며 일을 하다가 다음에 인사발령을 받아 옮긴 곳은 신규공무원들이 많은 동주민센터였다. 30대 중후반, 7급 승진을 목전에 둔 말년 8급은 그곳에서 갑자기 선배와 후배 사이에 꽉 끼인 포지션에 놓이게 됐다. 낯선 환경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 된 90년대생 신규들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젊음은 빛이 난다. 내가 만난 젊은 신규들은 똑똑했고 업무를 금방 익혔으며 눈빛이 반짝였다. 옷차림도 세련되고 깔끔했다. 외모와 상관없이 모두 예뻤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레 나의 신규 시절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시보를 달고 발령받은 동은 50대 7급 고참 주임님들이 주로 포진해있는 곳이었다. 팀원들이 나이가 지긋해서 말 한마디 꺼내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사무실에서 신규라는 이름으로 주눅이 들어있다가 퇴근을 하고 동기끼리 모이면 그제야 목소리가 커졌다.


내가 대학생 때만 해도 재학 중에 공무원을 준비한 사람이 주위에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 90년대생들은 취업이 쉽지 않은 세상에 처음부터 적응이 되어 있는 세대다. 일찌감치 공무원이라는 길을 정한 후 공직사회에 들어와서인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스스로의 권리를 챙기는 데도 적극적이다. 상대적으로 겁이 없고 권위에 대한 두려움도 크지 않다. 나 또한 개인주의를 신봉하지만 어쩔 수 없이 주위를 의식하며 성향을 억눌러왔다면 요즘의 개인주의는 단호하고 확실하다. 회식 때 도망가는 것도 거침없고 정시출근, 정시퇴근도 당당하다. 예전에 당연하게 요구됐던 후배로서의 눈치보기가 없다. 내가 만난 신규직원들은 그랬다. 나의 공무원 초년생 시절과 달랐다. 달라서 좋았다. 한마디로 예쁘고 쿨했다.






꼰대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90년대생 공무원에 대해 호의적인 시선을 늘어놓는 건 아니다. 사실 나는 방관자였다. 퇴직예정자라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선배의 입장이 아닌 중립지대에서 그들을 바라봤다. 어느 주임님이 같이 일하는 신규직원에 대해 책임감이 없고 힘든 걸 참을 줄 모르며 선배 어려운 줄 모른다며 내게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 주임님은 나보다도 한참 더 선배로, 막내라는 이유로 팀의 궂은일을 전담해야 했던 구시대를 인내해온 사람이었다. 주임님의 불만은 서로 간의 개인적인 성향이 상이해서 생긴 문제였지만 언뜻 시대를 잘못 타고 탔다는 억울함도 비쳐 보였다. 선배들의 등살에 고생하면서 이제야 겨우 선배가 됐는데 선을 확실하게 긋는 후배들에게 오히려 말 한마디 편하게 못하니 괜히 나만 고생했다는 억울함. 어쩔 수가 없다. 세상이 변했다.


세대를 구분 지어 각 집단을 대표적인 특징으로 정의하는 일은 흥미롭다. 퇴직 후에 「90년생이 온다」를 읽었는데 내가 현직에 있을 때 이 책이 나왔어야 했는데 아쉬웠다. 그랬다면 90년생 신규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선배가 됐을 텐데. 세대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세대차이보다 더 절대적이고 확연한 것은 개인차이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90년대생 공무원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매력적이다. 얼굴만 봐도 이마 한복판에 공무원이라고 쓰여있는 듯한 기성세대와 해맑은 소리로 웃는 신규직원들이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처음에는 둘 사이의 머나먼 거리를 확인하며 낯설어하기도 하지만 공무원으로서의 의무를 같이 해내고 직업적인 고충을 같이 나누며 동료가 되어간다.


내가 이모 삼촌뻘인 선배들과 일을 하며 친밀한 사이가 된 것처럼 내게도 그런 후배가 생겼다. 상대방의 사적인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고도 든든한 동료애를 나누는 사이. 같은 점에는 공감하고 다른 점은 새로운 문화로 받아들이는 관계가 직장생활에 기분 좋은 활력이 됐다.
 

새로운 세대가 사람 대 사람으로 다른 세대와 섞여가며 공무원이라는 집단에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오는 일을 상상해본다. 이들로 인해 공직사회가 얼마만큼 바뀔 것인가, 공직사회 속에서 이들이 얼마만큼 영향을 받을 것인가, 그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들이 공직사회에 적당히 동화됐으면 좋겠다. 어쩌면 공정하면서도 기발하고, 책임을 다하면서도 즐거운 공직문화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퇴직 한 달 전, 내 후임으로 또 한 명의 신규가 왔다. 대학을 갓 졸업한 25살의 공무원. 힘들다고 악명 높은 우리 동에서 공무원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신규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그만두기 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잔소리로 들릴 게 뻔해 딱 두 가지만 전했다. 마음이 급하다고 키보드를 쎄게 치지 말 것. 손목에 무리가 간다. 나도 건초염으로 고생했다. 민원이 앞에 많이 밀려있어도 꼭 제때 화장실에 갈 것. 방광염 생길 수 있다. 한 번 생기면 재발도 쉽다. 민원대 필수사항을 알려주고 나는 떠났다. 아니, 좋은 말도 많은데 왜 하필 건초염이랑 방광염이람. 나도 센스있는 선배는 아니었다.


하지 못한 많은 말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곳에서의 시간을 잘 이겨내길. 다음에는 이곳보다 덜 힘든 곳으로 발령받기를. 건강하게 일해서 정년퇴직까지 공무원 생활을 해나가기를. 직업적으로 보람을 느낄 수 있기를. 단단해지고 깊어져서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길. 직업적인 성취가 개인적인 목표와 많이 다르지 않기를. 이왕이면 주류에서 벗어나지 말고 좋은 부서에서 좋은 평판으로 문제없이 승진하길.


후배에게 건네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써 내려가다 보니 십 년 전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는 걸 알았다. 나도 내 젊음으로, 맑은 웃음소리로 사무실 한구석을 밝히던 신규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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