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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Sep 21. 2020

내 머리 위의 안테나

공무원 회상기 #18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다 보면 머리 위에 보이지 않는 안테나가 돋아난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탐색에 들어간 안테나의 끝이 초록으로 빛나는 순간을 사랑했다. 방과 후 교복을 입은 채로 주민센터를 찾는 고등학생의 목적은 주로 신규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한 경우가 많다. 지문 채취를 위해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양손에 검은색 잉크를 잔뜩 발라야 한다는 사실에 살짝 당황한다. ‘공부하기 힘들죠?’ 라거나 ‘사진이 참 잘 나왔네요.’라고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지문을 찍다 보면 경직된 얼굴이 점점 풀어진다. 어린 학생이라고 지문의 상태가 다 좋은 건 아니라서 십지문 채취가 마냥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 끝났습니다. 고생 많았어요.’라는 말에 활짝 웃는 학생들과의 만남은 대부분 평화롭다.


어르신들과의 만남에도 유난히 마음이 갔다. 천천히 설명을 드려야 하니 업무가 지연되기도 하지만 간단한 전입신고 하나에도 큰 짐을 처리했다는 안도감에 고마워하는 주름진 얼굴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긴 인생을 살아왔으니 사연도 많은 게 당연. ‘할아버지가 젊을 때 집을 나가 연락이 끊겼어’  ‘밤마다 불을 끄면 장롱 밑에서 곱등이가 나와’, ‘내가 글을 몰라. 쓸 수 있는 건 이름밖에 없어’ 삶의 회한과 하소연이 묻어나는 사연에 맞추어 해드릴 수 있는 일을 해드렸다.


어느 날은 아흔이 넘은 아버님이 오셔서 민원을 보다가 갑자기 주섬주섬 목에 메고 있던 명찰을 내밀었다. "우리 마누라인데 이쁘지? 몇 년 전에 죽었는데 보고 싶어서 항상 사진을 품고 다녀.”  그럴 때 내 안테나는 가끔 눈물색. 젊을 때는 간단했던 일이 이제는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만 처리할 수 있는 과제가 되어버린 어르신들을 보면 숙연해지지만 연세에 비해 단정하고 정정한 어르신들을 만나는 것 또한 기쁨이 되었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특별히 더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손이 자꾸 빗나가는 민원인 대신 서류를 돌돌 말아 봉투에 넣어줬는데 예의바르게 감사인사를 하는 사람, 적은 금액도 카드결제가 된다는 안내에 뛸 듯이 좋아하는 사람, 친절에 대한 보답이라며 잔돈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끝까지 돌려드리지만), 평소대로 응대를 했을 뿐인데 불친절한 공무원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졌다고 고마워하는 사람. 일 때문에 잠시 스쳐가는 사이지만 이것 또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들.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이 없을지라도 따뜻한 미소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시간에 감사한다. 공무원을 하면서 사람들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꼭 어리고 예쁘고 귀여워야만 사람이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하지만 애초에 머리 위에 안테나가 생긴 이유는 갑자기 일어날 비상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상대를 보자마자 순간적인 판단을 내리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조금이나마 방지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안테나가 작용하는 기준이 내가 제멋대로 만들어놓은 일반화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날수록 안테나의 성공률이 높아진 것 맞지만 여전히 결과는 오리무중이었다. 은은하게 향수 냄새를 풍기는 반듯한 인상의 민원인을 보자마자 켜진 초록색 불이 한순간에 빨간 불로 바뀌는 일이 반복됐다. 옷차림이 단정한 사람이, 말을 조리 있게 하는 사람이, 젊은 사람이, 여성이,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 반대에 비해 온화한 민원인일 확률이 높다는 내 편견을 뒤흔드는 사건을 자주 겪었다.


환경개선 부담금 관련 업무를 하던 시절이었다. 돈과 관련된 일인 데다 체납이 되면 재산에 압류가 붙기 때문에 화가 나서 방문하는 민원인이 대다수였다. 그날도 넓은 사무실의 저 복도 끝에서 날 찾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여기 부담금 관련 부서가 어디예요?”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는 어두운 기운을 느끼며 책상에 앉아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민원인과 눈을 마주쳤는데 앞니가 여러 개 빠져있는 아저씨 한 분이 서있었다. 옷은 낡고,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파여있었다. 행색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고 난 후였지만 전화로 문의해도 될 일로 직접 구청까지 찾아왔으니 분명 화가 많이 났을 거라는 빨간 불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어떤 화를 당하게 될지, 어떻게 그 상황을 진정시켜야 할지 정신없이 머리가 돌아가는 중에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밀린 세금 내려왔어요.”


아저씨는 경제적인 사정이 좋지 않아 부담금 고지서가 나오는 걸 알면서도 납부할 수 없었다며 몇 년간 밀린 부담금을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해 고지서를 발급받으러 오셨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말투도 온화하고 진심으로 체납을 미안해하고 계셨다.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경제적인 사정이 괜찮아도 일부러 체납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한걸요.’


고지서를 발급해드리는 짧은 시간에도 아저씨의 인생과 성품에 가슴이 흔들렸다. 마음 같아서는 전산에서 부담금 내역을 다 삭제해드리고 싶었다. 내 사업이었다면 그랬을 거다. 하지만 법에 따라 절차를 거쳐야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정중하고 상냥하게 응대해드리고,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밖에 없었다. 아저씨가 고지서를 들고 사무실을 떠났다. 그냥 보내기가 서운해서 엘리베이터 앞까지 모셔드렸다. 안테나 끝에서 울리는 빨간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는 순간이 쌓여갈수록 사람을 한눈에 판단하는 일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도 그들을 정해진 카테고리 안에 넣을 수는 없다. 


막무가내에다 입까지 험한 민원인을 만나면 심장이 요동친다. 연이어 안테나가 빨간색으로 울릴 것 같은 두려움이 들어 벨을 누르는 손길을 주저하게 된다.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용기를 내어 벨을 누른다. 멋대로 켜지려는 안테나는 꺼두고 한 명 두 명 수줍기도 어색하기도 씩씩하기도 한 보통 사람들과 마주하면 어느새 어지러웠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모가지를 잘라버리겠다고 소리치고, 사무실을 불태워버리겠다고 악을 쓰는 사람들에게 시달렸지만 인간에 대한 회의보다는 애정을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평범하고 평범한 이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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