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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Oct 10. 2021

자꾸만 돌아가야 하는 그곳 - 쇠백로

미물일기 #7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 상황을 만나 좌절할 때가 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마음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도 어느 시점에서는 양쪽에게 부담스러운 일처럼 느껴져 입을 닫게 된다. 집안으로, 방으로, 침대로, 이불속으로 숨어들어 고립된다. 홀로,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만을 곱씹다 보면 고통이 자꾸만 커져 눈앞을 덮는다. 남을 의지할 수도, 나를 의지할 수도 없을 때, 갈 곳은 하나뿐이다. 작은 호수를 둘러싼 흙길 위, 나무와 풀, 꽃과 새가 있는 곳. 작년, 밥벌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자격지심에 힘들었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을 때도 할 수 있는 일은 호숫가를 걷는 것이었다.


무거운 이불을 힘겹게 걷어내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면 이런 소리가 들린다. "나가서 뭐 해? 맨날 걷는 그 길이 그 길이지. 어제와 다를 게 없을 텐데, 지금 너의 상황처럼." 일단 길을 나서면 알게 된다. 흙 위에서는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다. 이불속에 처박혀 나 자신의 괴로움만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도 자연은 부지런하다.


겨울의 끝자락, 사방이 아직 흙빛이다.  봄이 오긴 하는 건가 의구심이 드는 찰나, 양지바른 언덕에 돋아난 초록 이파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작디작아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파란색 봄까치꽃이 점점이 돋았다. 개나리와 비슷하지만 동글동글한 노란 영춘화가 폈다. 꽃잎을 삐쭉 내민 산수유나무 너머로 왜가리가 나뭇가지를 물어 집을 고친다. 걷고 보고 멈추고 냄새를 맡고 다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나와 나를 괴롭게 만드는 문제로 꽉 차 있던 세상에 나무와 풀과 꽃과 새가 들어온다.






자연 속을 거닐면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 분비가 증가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분비가 저하된다. 혈압이 내려가며 식물에 내뿜는 휘발성 화합물인 피톤치드로 인해 자율신경이 안정된다고도 한다. (참고 - <야생의 위로>, 에마 미첼 지음, 푸른숲) 하지만 과학적인 설명 없이도 나무와 흙냄새를 맡는 순간, 몸이 먼저 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하루가 다르게 버드나무 가지에 연두색 물이 올라와서 신기하다 싶으면 벌써 영춘화는 시들어가고 개나리가 만개한다. 배추흰나비와 노랑나비, 네발나비가 민들레 위를 나풀거리고 목련이 하얀 꽃봉오리를 터트린 날, 호수 가운데 내가 새들의 섬이라고 부르는 작은 섬 위로 백로 떼도 하얗게 피어났다. 왜가리와 해오라기가 머무르던 곳에 쇠백로 떼가 언제부터 집을 지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


새 이름 앞에 '쇠'가 붙으면 작다는 의미라고 한다. 쇠백로는 백로 중에서도 제일 작은 종류다. 왜가리와 같이 서 있으면 크기 차이가 뚜렷하다. 몸집도 작지만 중백로, 중대백로 등 다른 백로와 확연하게 다른 점은 노란 양말을 신었다는 것이다. 까만 다리에 발만 노란색이다. 그래서 더 귀엽다. 여름 철새인데 언젠가부터 우리나라 곳곳에서 텃새처럼 머무르는 일이 자주 관찰된다고.










계절은 빠르게 변한다. 며칠 산책을 나서지 않았을 뿐인데 그 사이에 목련이 지고 벚꽃이 만개한다. 꽃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금방 벚나무에 초록색 버찌가 잔뜩 달린다. 섬은 이제 만석이다. 쇠백로의 번식이 시작됐는지 나무마다 층층이 둥지가 가득 들어찼다. 백로들이 하얀 날갯짓을 하며 '꾸르륵 꾸륵 꾸륵 깍깍' 공룡의 후예답게 울어댄다. 여름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호숫가에 찔레꽃과 장미가 피고 보랏빛으로 익은 버찌가 보석처럼 길 위를 굴러다닌다. 피고 지는 꽃들 사이를 걷다가 새들의 섬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쇠백로 떼를 바라보는 것이 산책 중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 됐다. 무성해진 나뭇잎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새끼를 양육하느라 새들이 바빠 보인다. 생명의 활기로 가득 찬 소란스러운 섬을 바라보면 혼자가 아닌 것 같다. 자귀나무의 분홍색 꽃이 내뿜는 황홀한 향기를 맡으며 백로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멀어지고 무심코 행복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한여름, 수위가 얇은 호수 가장자리에 쇠백로 유치원이 생겼다. 어린 백로들이 여러 마리 모여 어설프게 먹이를 사냥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왜가리 두 마리가 선생님처럼 쇠백로 무리에 끼어있다. 유난히 어설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물고기를 잡겠다고 겅중겅중 뛰어다니는데 아무것도 잡지 못한다. 시멘트로 된 보 위에 덜 자란 해오라기들이 나란히 앉아 어린 백로가 불필요한 동작으로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그 모습이 꼭 응원이라도 하는 것 같아 웃고 말았다.


가을이 왔다. 섬은 온종일 비어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먼 하늘에서 하얀 점들이 나타난다. 쇠백로가 종이비행기처럼 가볍게 날아 섬 주위를 빙빙 돌다가 나무 위로 앉는다. 해가 저문다. 어둠이 내려오고, 백로가 섬에 스며 보이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쇠백로 떼와 함께 봄, 여름, 가을을 보냈다. 그리고 맞이한 겨울, 생일날 아침에 메리 올리버의 시를 읽었다.


하나의 세계에 대한 시


오늘 아침

아름다운 백로 한 마리

물 위를 떠가다가


하늘로 날아갔지

우리 모두가 속한

하나의 세계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다른 모든 것들의 일부가 되는 곳


그런 생각을 하니

잠시

나 자신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져.


- <천 개의 아침> 마음산책





나 자신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호숫가 작은 숲을 걷고 쇠백로를 바라보며 나는 거미줄에 말린 먹이처럼 이불에 둘러싸여 옴짝달싹할 수 없던 고립의 시간을 끊어내고 다시 자연과 연결될 기회를 찾았다. 전부로서의 내가 아니라, 자연 속 일부로서의 나로 존재했다. 나는 점점 작아지고 나를 괴롭히는 것들도 같이 작아졌다. 숲에서, 나는 주름 팬 딱딱한 나무껍질 사이에 있었다. 연두색으로 돋아난 버드나무 이파리 안에, 목련 꽃잎 안에 있었다. 둥지를 짓고 알을 품은 새들 품에,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하나하나에 있었다. 자신의 계절을 맞아 피어나는 꽃들에, 자신의 계절을 지나 색색이 물든 잎을 떨구는 나무 속에 있었다. 섬 위에 꽃을 피운 백로 떼 안에 있었다.


힘든 시간은 반복해서 찾아온다. 절망의 시기가 되면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며 회복했던 경험을 잊고 나는 다시 방 안에 틀어박힐지도 모른다. "어제와 다를 게 없을 텐데, 지금 너의 상황처럼."이라는 목소리가 훼방을 놓아도 한 가지만은 잊지 말자. 흙과 호수, 나무와 꽃과 새가 있는 곳에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이 있다. 우리 모두가 속한 하나의 세계,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을 멈추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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