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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Oct 19. 2021

좋아하는 나무가 있나요? - 도시의 나무

미물일기 #8

플라타너스가 가로수로 심어진 보도를 지나는데 학생 한 무리가 길게 늘어진 플라타너스 잎을 세게 때리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무 의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물체를 치고 간 것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학생들의 행동에 내 눈썹이 슬프게 처졌다. 가만히 있는 나무를 왜 때려.


원래 나는 식물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동물만 좋아하는 동물파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슬금슬금 식물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식물에 대한 지식은 부족해도 핸드폰 사진첩만큼은 꽃과 풀과 나무 사진으로 가득하다. 정통 식물파인 엄마(취미 : 화초 키우기)와 산책을 가도 엄마보다 내가 나무와 들꽃 앞에서 멈춰서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오래 같은 길을 걷다 보니 눈에 익은 나무들이 생겼다. 도시 안의 작은 호수에는 여러 나무가 있지만, 더 눈길이 가는 나무들이 있다. 잠시라도 멈춰 서서 '꽃은 잘 피고 있나? 이파리는 잘 물들었나?' 안부를 묻고 싶은 특별한 나무들. 나는 그들을 아는 나무라고 부른다.


호수를 산책하다 제일 먼저 만나는 아는 나무는 커다란 느티나무다. 느티나무는 대표적인 가로수다. 공무원 시절, 주말마다 그림을 그렸던 카페와 첫 번째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던 합정의 어느 카페도, 최근 동네에 새로 생긴 힙한 카페도 모두 창밖으로 느티나무가 보였다. 뾰쪽뾰쪽한 이파리가 예뻐서 왜 가로수로 사랑받는지 알 것 같다. 가을이 되면 진한 노란색의 잎들이 도심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예로부터 마을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는 쉼터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정자나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서울에도 몇백 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다수 존재한다.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수의 느티나무는 키가 크고 커다랗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나뭇잎이 하늘 전체를 덮어 처음에는 느티나무인 줄도 몰랐다. 예전이라면 그 밑에 정자가 있어도 좋았겠지만 호수의 느티나무는 지금, 사람 대신 새를 품는다. 이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무가 참새들의 침실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해가 질 무렵이면 호숫가의 작은 새들이 느티나무로 몰려 짹짹거리는데 그 소리가 언제 들어도 정겹다. 어두운 밤, 새들의 포근하고도 아늑한 잠자리가 되어주는 커다란 나무가 든든하다.











느티나무를 지나면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던 자귀나무 두 그루가 나온다. 초여름이 되면 나무는 가늘고 하늘거리는 분홍색 꽃을 피우는데 사실은 꽃잎은 퇴화하고 가느다란 수술이 모여 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자귀나무는 꽃뿐만 아니라 잎의 모양도 독특한데 줄기를 사이에 두고 작은 잎들이 마주 보며 붙어있다. 한 드라마에서 자귀나무가 부부의 사랑을 상징한다는 이야기를 보고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 이유가 잎에 있었다. 밤이 되면 마주 보던 잎사귀가 서로를 향해 닫히는데 그 모습이 남녀가 사이좋게 안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분홍 꽃과 진한 초록색 잎사귀에, 향기마저 진해서 자귀나무는 이국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자귀나무가 피는 초여름이 되면 평소보다 더 부지런하게 호수를 찾게 된다.


호수 산책로의 반환점을 돌면 목련 세 그루가 있다. 비교적 최근에 심어졌는지 호숫가의 다른 목련보다 작아서 눈에 띈다. 목련은 암수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자매 같은 느낌이 들어 목련 세 자매라고 부르고 있다. 다른 나무들과 살짝 거리를 두고 있는 제일 작은 나무는 딱 귀여운 막내 같고, 중간에 있는 나무는 가지가 바람결에 따라 옆으로 출렁이고 있어 우아한 둘째가 어울리고, 바르게 서 있는 나무는 침착한 첫째 같다. 언제 봐도 아름답지만 역시 목련은 꽃이 필 때가 가장 환상적이다. 인적이 끊긴 까만 밤이 되면 세 자매가 하얀 꽃을 매달고 춤이라도 출 것 같다.


목련을 지나 조금만 걸으면 무슨 연유인지 큰 줄기만 남은 버드나무가 있다. 호수에 있는 버드나무는 대부분 물가에 나 있는데 이 녀석만 물 쪽이 아니라 밭쪽에 있다. 모두들 풍성한 초록색 머리카락을 호숫가에 드리우고 있다면, 이 버드나무만 머리숱도 없이 혼자 떨어져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간다. 대신 나무는 다른 것을 가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나무 등치를 껴안는다. 나도 가끔 나무껍질에 손을 대본다.






우리는 나무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글로 배워 알지만, 그 사실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도 그랬다. 아는 나무가 생기고 그들의 사계절을 지켜보며 이제야 나무에 관심과 애정이 생겼다. 무언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부작용도 있다. 예전보다 신경쓰이는 일이 늘었다. 작은 아파트를 둘러싼 낮은 담을 도색하는데 담 주위에 있는 화단에까지 도료를 분사해서, 담을 따라 서 있는 나무와 풀들이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있는 광경을 봤다. 담과 화단 사이에 가림막 하나만 설치하면 될 것을,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을까 화가 난 적이 있다.


부모님 댁을 방문했다가 아파트 단지에서 놀라기도 했다. 오래된 단지라 커다란 은행나무들이 많은 곳인데 일반적인 범주의 가지치기를 넘어 나무가 아예 삼분의 일이 넘게 잘려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목이 사라지고 몸만 남은 것처럼 끔찍한 몰골로 느껴졌다. 과도한 가지치기를 강전정이라고 하는데 세계 각국에서는 강전정을 금지하며 관련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관리주체에 따라 아직 가지를 얼마나 잘라야 하는지 기준이 제시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는 뉴스를 나중에 봤다.


얼마 전에는 매장 공사가 진행 중인 스타벅스 앞 가로수가 고사해 뉴스가 됐다. 누군가 농약 성분을 나무에 주입해서 일부로 고사시킨 것으로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건의 진행이 궁금해 검색해보니 해당 건물 관리인이 검찰에 송치되었다는 소식이 가장 최근에 나온 뉴스였다. 나무는 말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으니 자꾸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는가 보다.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물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는데 하물며 나무는 말해 무엇할까.






반지의 제왕에는 나무수염이라는 엔트가 등장한다. 엔트는 나무의 목자다. 나무를 길들이며 가르치고 잡초를 뽑으며 숲을 돌본다. 낯선 자들과 무모한 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숲을 보호한다. 누구의 편도 되지 않고 오랜 세월을 보낸 엔트지만 백색 마법사 사루만이 오크들과 결탁하여 나무들을 베어버리고 숲을 파괴하자 종족 회의를 소집하고 사루만의 본진 , 아이센가드로 진격하여 몰락시킨다.


현실에 엔트는 없지만 대신 도시의 나무들을 보호하는 법이 있다. 도시숲 등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약칭 도시숲법이다. 이 법에 따르면 정당한 사유 없이 도시숲등과 그 부대시설을 훼손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나무를 함부로 대하는 이들도 사람이지만 현대사회에서 도시 나무들의 목자가 되는 이 역시 사람 일수 밖에.


플라타너스 잎을 찰싹 때리고 갔던 학생들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나무 아래를 걷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무에 핀 꽃을 바라보고, 부모가 되어 나무의 이름을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그 이름을 알려줄 수도 있다. 외로운 바람이 부는 날에는 홀로 묵묵하게 서 있는 나무 곁에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 무성하고 아름다운 녹음 속에서 삶의 기쁨을 한껏 누리는 날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나무를 보다가 그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른이 되어, 나무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겠지.


참고도서

<우리 나무의 세계 1>, 박상진 지음, 김영사

<내 이름은 왜>, 이주희 지음, 자연과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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