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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Oct 22. 2021

당신이 좋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 사람

미물일기 #9

오래전의 일이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는데 앞서 걷고 있던 사람의 옷차림새가 눈에 띄었다. 체구가 작은 여성이었는데 갈색 체크무늬 장화에 분홍 체크무늬 남방이 미묘하게 충돌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체크무늬의 그 사람이 갑자기 길가에서 등을 구부려 뭔가를 집어 들었다. 까맣고 큰 제비나비였다. 나비는 이미 죽었지만, 그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지 않도록 길옆 화단으로 나비를 옮기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체크무늬를 사랑하는 행인으로만 존재하던 그 사람이 달라보였다.


그 장면은 기억에 오래 남았다. 작은 생명을 무심하게 지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상에서 드물게 만나는 순간이라서 그런 것 같다. 길에 누워있는 곤충을 손으로 잡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던 때라 더 인상적이었다. 작은 조각으로만 내 안에 존재하던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이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는 큰 조각으로 빛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 년 후, 나는 이따금 지렁이를 풀밭으로 옮겨주고(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니다), 집에 들어온 벌레를 밖으로 돌려보내며 그 활동을 자랑하듯이 글로 옮기는 사람이 되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동네 친구가 있다. 얼마 전에 그가 고맙게도 미물일기를 읽은 감상을 인스타에 올렸다. 미물일기 지렁이 편을 보고는 길에서 만난 지렁이를 나뭇가지로 옮겨 보려고 끙끙대다가 포기했다고 한다. 시도했다는 자체만으로 나도 좋은 사람이라며 뒤돌아섰지만 돌아오는 길에 벌레를 거침없이 죽이고, 개는 아니지만 돼지는 먹는 자신이 지렁이를 살려주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 그 모순을 떠올렸다고 했다.


글쓰기 친구를 고민에 빠트렸던 모순은, 나 역시 오래도록 갈팡질팡하게 만든 아이러니였다. 죽은 나비와 지렁이를 신경쓴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은 생명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사람의 인격이 훌륭하다는 보장은 없다. 인간은 평면적이지 않다. 자신의 반려동물은 소중히 여기면서도 다른 생명에게는 시니컬할 수도 있고,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않은 사람이지만 인간을 혐오할 수도 있다. 나만 해도 그렇다. 속이 좁고 의심이 많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어둡고 비밀스럽고 음흉한 구석도 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고백의 시간을 갖자면,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어중간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 번 채식을 결심하고는 포기를 반복하다가, 요즘은 고기 먹는 횟수를 줄이는 것으로 자책을 피하고 있다. 횟집 광어와 자꾸 눈이 마주쳐서 회를 먹지 않고 있는 대신, 생선구이는 먹는다. 간간이 생분해 제품을 사용하는 시늉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일회용품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도덕적 결함이 적지 않은 인간이며, 기후위기시계를 앞당기고 있는 지구의 환경파괴범이다.


지렁이나 벌레를 옮겨주는 일도 솔직히 말하면 내게 의미를 알 수 없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을 사랑하는 따듯한 품성의 발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취향이며 취미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린다. 평소에는 고기를 먹고 환경을 파괴하다가 종종 벌레 몇 마리를 당장의 죽음에서 구한다 한들, 덕이 쌓일 리가 없다. 집에 들어온 돈벌레나 거미를 베란다 밖으로 내보낼 때마다 너무 세게 내던져서 오히려 나 때문에 죽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벌레를 죽이는 행동에 대해서도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는 않는다. 모두 나와 같을 수는 없으니 일부러 다른 생명을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가학적이고도 역겨운 행동을 일삼지만 않는다면 밥상에서 파리를 잡는다고 해서 당장 그 사람과 절교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미물에게 마음을 쓰는 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기대 때문이다. 나는 좋은 사람도, 착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면 좋겠다는 기대. 꼼지락거리는 벌레의 안위를 염려하는 세심한 성정의 사람이라면 적당히 못된 사람이 돼야만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언제라도 다시 적당히 착한 사람으로 되돌아갈 것 같아 안심된다. 타자에 대한 연민이 있으니, 벌레와 동물 그리고 사람,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생명의 어깨에 얹힌 짐을 덜어주고픈 사람이길. 찰나의 장면을 목격한 이들로 하여금 ‘한낱 벌레에게도 친절한 사람이 있으니, 앞으로 힘들 때, 누군가도 내게 친절할 수 있겠구나, 살만한 세상이다’ 느끼게 하길 막연히 희망한다. 그런 까닭에 눈에 보이는 족족 벌레를 잡아 죽이는 사람보다는 미물을 향해 '너도 살아있구나.'라는 자세를 보여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지난여름, 직박구리 한 마리가 길 위에서 매미를 입에 물었다. 새들이 매미를 사냥하는 일은 흔하다. 매미는 애절한 비명음을 내고 있었다. 갑자기 아주머니 한 분이 직박구리를 향해 뛰어가니 새는 놀라 날아가고 바닥에는 기운을 잃은 매미만이 남았다. 아주머니는 매미의 날개 한 짝을 잡아 풀밭에 놓아줬다. 어차피 죽어가던 매미였다. 직박구리의 한끼 식사가 되는 편이 생태계 효율을 위해서도 나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매미를 향해 달려가는 아주머니의 다급한 발걸음이 기뻤다. 죽어가는 매미는 많으니 먹이를 놓친 직박구리도 곧 어렵지 않게 배를 채웠을 것이다.


새벽 산책 중 나무다리 위를 걷다가 내 몸통보다 큰 거미줄을 만난 적이 있다. 통로 전체를 막고 있는 거미줄 가운데서 거대한 거미가 아침식사로 풍뎅이를 먹고 있었다. 하필 위치가 얼굴 근처라 그대로 지나갔다면 거미와의 키스로 아침을 시작할뻔했다. 거미줄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허공에 대고 마임을 하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살피다 허리를 굽혀서 힘들게 거미줄 반대편으로 나왔다. 아저씨가 다가오길래 여기 거미줄이 있다고 알려줬는데 사실 이 분은 나무다리 위의 파이오니아였던 것. 매번 이 길을 다니는데도 밤이면 거미줄을 크게 쳐놓는다며 거리가 꽤 있는 자귀나무에서부터 시작해 거미줄을 만드는 것이라며 신기하다고 했다.


조만간 사람의 통행이 이어질 곳이니 누군가는 거미줄을 헤쳐야 했고 아저씨는 자주 그 역할을 맡고 듯했다. 그는 거미줄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보고 단번에 거미줄을 내려치지 못하고 나와 거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내 사인을 기다렸다. 아저씨의 갈 길을 돕기 위해 내가 결단을 내렸다. "어쩔 수 없죠. 어차피 이 거미줄을 끊어야 하니까요." 아저씨는 "그럼."이라고 대답하고는 거미줄을 끊었다. 솜씨 좋게 거미줄 끝을 두 군데만 쳐내니 거미는 거미줄과 함께 다리 건너로 풀숲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서로 수고하라는 인사를 남기고 헤어졌다.





실용적인 이유였겠지만 어찌 됐든 거미가 다치지 않게 거미줄을 끊은 아저씨의 섬세함에 기분이 좋았다. 사진을 찍는 나를 기다려주고, 거미줄을 끊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그날 아침, 거미는 맛있게 즐기던 아침 식사를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다시 거미줄을 칠 기회를 얻었다. 거미줄 앞에서 마임을 하는 대중적이지 못한 취향을 가진 나도 거미와 함께 아저씨에게 배려받는 기분이었다. 글쓰기 친구가 전해준 지렁이 구하기 소식에 기뻤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를 따라 나뭇가지로 지렁이를 옮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타인의 독특할 수도 있는 행동을 의아해하면서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보였다. 죽은 나비를 옮겨주던 사람을 만난 것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비둘기를 날리지 않으려고 몇 발자국 돌아가는 사람, 길에 밟힐 뻔한 곤충들을 구해주는 수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눈에 띈다면 밟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사마귀를 잡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채집의 기회를 경험하게 하면서도 집에 갈 때는 사마귀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잡은 곤충을 풀어주길 권유하는 사람, 집에 들어온 바퀴벌레나 모기를 죽여야 한다면 고통을 길게 주지 않고 딱 한 번에 깔끔하게 죽이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평소에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존중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일은 감격스럽다. 그 시도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비효율적인 에너지의 낭비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런 장면을 만나면 나는 마음속으로 살만한 세상이라고 휘파람을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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