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몫의 삶을 다하고 떠난 생명에게 존경을 - 고양이

미물일기 #11

by 진고로호

유난히 자주 죽음을 만난 여름이 있었다. 나비는 차 바퀴에 깔려, 송충이는 땅에 떨어져 죽었다. 알을 품은 채로 누군가의 발에 밟혀 죽은 알락하늘소와 둥지에서 떨어졌는지 호수에 빠져 죽은 어린 해오라기를 봤다. 상처 하나 없이 보도 가운데 누워있던 쥐는 자는 듯 보였고, 호숫가 산책로에는 매일 아침 수많은 풍뎅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죽음 뒤 남겨진 생명의 흔적을 수도 없이 발견했다. 그 여름, 내 고양이에게도 죽음이 찾아왔다. 13년 6개월을 같이 했던 고양이의 생명이 꺼져가는 과정을, 마지막 숨을 내쉬는 동시에 따뜻했던 몸이 주인을 잃고 텅 비어버렸던 순간을 목도했다.


흰색 털에 검은색 무늬, 분홍 코에 눈이 초록색으로 빛나던 고양이였다. 먹을 것을 좋아했고 대담했으며 삶에 대한 열정과 나를 향한 사랑이 강렬했던 녀석이었다. 오랜 기간 원인불명의 구토 증상이 있어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밥을 먹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위에 커다란 종양이 보인다고 했다. 불과 3개월 전 검사를 받았을 때는 혹도 없고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는데 그 사이에 백혈구 수치가 크게 증가했고 빈혈이 생겼다. 고양이는 2주 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누군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고양이들이 죽으면 어떡할 거냐고? 많이 슬프지 않겠냐고. 나는 탈무드에 나오는 하나님이 맡긴 보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랍비가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사이에 아픈 아들 둘의 상태가 악화되어 죽었다. 집에 돌아온 랍비에게 아내는 어떤 사람이 잘 보관해달라며 값비싼 보석을 맡겼는데 갑자기 그 보석을 찾아가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다. 랍비는 당연히 돌려줘야 한다고 대답했고 이에 아내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긴 두 개의 보석을 가져가셨다고 말한다. 종교는 없지만 나 또한 그와 같이 생각하고 싶었다. 언젠가 되돌려줘야 할 보석처럼 고양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소중하게 보내다가 때가 오면 너무 슬퍼하지 않고 보내주겠다고 했다. 고양이들의 수명이 인간보다 짧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고 그들의 끝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고 말이다. 말을 마치고 나는 스스로 대답에 흡족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도 감탄한 눈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때 나는 겪어보지 않은 죽음 앞에서 자만했었다.


병원에 다녀온 날부터 고양이는 밥을 먹지 않았다. 털을 고르는 일도 멈췄다. 어두운 화장실에 숨어 들어가 차가운 타일 위에 누웠다. 비틀거리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힘없이 주저앉았고 물을 마시려다가도 그대로 물그릇 위에 머리를 기대고 웅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밥을 먹지 않은 고양이에게 주사기로 유동식을 먹이고 혹시나 통증이 심할까 작은 입을 벌려 억지로 약을 먹이는 일 정도였다. 삶의 끝을 향해 가는 고통스럽고 외로운 과정은 온전히 고양이의 몫이었다. 죽음을 앞둔 고양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얼마 없다는 사실에 절망과 무력감에 빠졌다. 고양이와 함께했던 세월이 인생에서 통째로 소멸해버리는 것 같은 상실감이 들었다. 매 순간이 가슴 아팠고 괴로웠다.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며 틈나는 대로 예정된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해왔는데 오랜 노력이 무색했다. 모든 게 나 때문이라는, 내가 더 신경을 써서 고양이를 돌봤다면 이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자책이 밀려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어지면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호숫가로 향했다.


이상기후 때문인지 호숫가를 둘러싼 흙길 위로 예년보다 많은 풍뎅이가 죽어있었다. 정확히 어떤 종류의 풍뎅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색이 까맣고 그 수가 너무 많아, 멀리서 보면 땅에 짓이겨진 블루베리 같았다. 풍뎅이들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땅만 보며 걸어야 할 정도였다. 이미 여러 번 밟혀 납작해진 녀석들 사이에 잠들듯 온전하게 죽어있는 풍뎅이도 있었다. 기운이 빠진 체 배를 드러내고 천천히 죽음을 기다리는 풍뎅이도 있는가 하면, 몸의 일부만 살짝 밟혀서 다리를 휘적거리며 죽어가는 녀석도 있었다. 풍뎅이의 죽음은 고양이의 죽음보다 쉬울까? 고양이의 죽음은 사람의 죽음보다 가벼울까? 이 세상에 작은 죽음이 있는지, 쉬운 죽음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풍뎅이가 죽는 것처럼 고양이도 죽고,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만 알았다. 마치 초등학생 시절 교실에서 맞았던 예방접종처럼, 우리 모두 줄을 서 통과해야 할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의 죽음은 나의 잘못 때문에 찾아온 벌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었다. 풍뎅이를 밟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죽음 사이를 걸던 시간이 내게 작은 용기를 되었다.







누구나 거쳐야만 하는 시간이라면 세상이 무너질 듯 호들갑을 떨며 비참한 심정으로만 이별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고양이에게 턱받이를 해주고 주사기에 곱게 간 캔을 먹일 때면 세상에서 가장 신난 사람이라도 되는 것 마냥 "우리 고돌이 밥도 잘 먹네, 아이 이뻐라!"라고 떠들었다. 누워있는 고양이의 귓가에 달콤하게 "고돌이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라고 말했다. 고양이와 함께여서 좋았다. 사랑했고 행복했고 따듯했고 즐거웠다.


슬픔을 뒤로 미루고 고양이의 곁을 지켰다. 그날이 됐다. 고양이가 화장실에 누워있었다. 고양이를 안아 침대에 눕힌 다음 씻고 나왔다. 침대 위에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는데 기운 없고 통증이 묻어나는 짧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숨 쉬는 모양이 살짝 이상했다. 거친 느낌이었다. 숨이 점점 더 거칠어 오더니 순식간에 고양이는 숨을 꺽꺽 내뱉기 시작했다. 심한 경련은 없었지만 숨을 뱉을 때마다 몸이 흔들렸다. 고양이가 떠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큰소리로 남편을 불렀고 고양이에게 최대한 몸을 가까이했다. "걱정 마, 고돌아. 우리가 끝까지 너랑 같이 있을 거야. 고돌아. 사랑해"라고 속삭였다. 갑작스러운 정적. 나는 고양이가 아직 살아있는 줄 알았다. 얼굴을 보니 동공이 확장됐고 혀가 옆으로 나와 있었다. 똥이 한 덩어리 작게 흘렀다. 그제야 고양이가 죽은 걸 알았다.


오열이 터져 나왔지만 동시에 안도했다. 고양이의 고통이 끝났다. 길에 내뺀 혀도 축 늘어진 몸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생명의 빛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예쁘고 사랑스러운 내 고양이였다. 죽어서도 사랑한다고 말해주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어서 한참이나 고양이를 어루만지며 못다 한 말을 전했다. 신체 구조상 고양이는 눈을 뜨고 죽는다고 한다. 여러 번 감겨줬는데도 눈이 잘 감기지 않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눈을 감긴 상태로 1분 정도는 유지를 해야 눈이 감긴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고양이는 자는 것 같았다. 강급으로 인해 입 양쪽에 살짝 지저분한 흔적만 있을 뿐 배는 통통하고 얼굴은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그해 여름 죽음을 맞이한 생명은 이 작은 별에 태어나 자신의 시간을 살았다. 시끄러운 죽음이든 고요한 죽음이든, 누군가가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든 아니든 제 몫의 삶을 다했다. 풍뎅이의 삶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지만, 곤충의 감각으로 태양과 달, 땅과 공기, 기쁨과 고통, 그리고 태어남과 죽음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고양이가 자주 보여줬던 나른하고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떠올렸다. 보드라운 배를 무방비로 드러내고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고양이의 안락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태어나서 살고 죽는다는 생명의 소임을 다하고 살아있는 자들의 이해가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났다. 그것으로 다 됐다.


머릿속에서 죽음이란 단어가 떠나지 않던 여름을 보내고도 나는 앞으로 겪어야 할 이별이 무섭다. 고양이가 네 마리나 남아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 무섭고 두렵지만 그럴수록 나 또한 하나의 생명으로 삶과 죽음의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같은 줄에 서 있다가 먼저 죽음을 맞이한 존재들에게 존경을 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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