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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위에 피어난 크리스마스 - 인도고무나무

미물일기 #12

by 진고로호

엄마는 화초를 키웠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우리 식구는 방 한 칸에 살았다. 방에는 작은 부엌이 딸려있었는데 거기서 밥도 하고 세수도 하고 목욕도 했다. 화장실은 마당을 지나 연탄을 보관하는 광 옆에 있었다. 화초 키우기는 거실이 따로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나서야 생긴 엄마의 취미생활이었다. 나는 어려서 방 한 칸에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겨울이면 매일 새벽 연탄을 갈고, 좁은 부엌에서 물을 끓여 애들을 씻겼을 젊은 엄마는 새집으로 이사를 하며 가슴이 벅찼을 것이다. 그때 식물을 키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거실 한편에 화분이 줄줄이 생겼다. 화분 사이에는 고무대야에 자갈을 깔고 금붕어도 키웠다. 시멘트로 지어진 아파트 안에 작은 초록색 숲이 생겼다.

식물과 함께 생활했지만 나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양한 이름을 가졌을 식물을 한데 뭉뚱그려 화초라고만 불렀다. 그 가운데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고무나무뿐이었다. 커다란 진초록 이파리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엄마는 문방구에서 파는 알록달록한 전구와 반짝이 모루를 고무나무에 둘렀다. 아직 다 크지 못해 키가 작고 이파리가 몇 장밖에 없던 고무나무는 소박한 장식을 달고 우리 집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됐다.


그 후 수많은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위로 접힌 가지를 아래로 하나하나 잡아당겨 만드는 숱 없는 인조 트리를 집에 들이기도, 잘 사는 친구네서 천장까지 닿는 웅장한 트리를 구경하기도 했다.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머물렀던 호스트 패밀리의 집에서는 진짜 나무에다 오래도록 간직하며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를 달았다. 스위스와 폴란드의 가정집에서 봤던 크리스마스트리도 신기했다. 연말이면 시내 곳곳을 밝히는 거대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들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봐도 키 작고 윤이 나는 고무나무가 생각났다.




부모님에게 어린 시절 고무나무에 전구를 달아 크리스마스를 기념했던 일이 기억나냐고 물었더니 "우리가 고무나무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줬었니? "라고 반문이 돌아왔다.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기에 그 시절 엄마 아빠는 열심히 돈을 벌고, 그 돈을 아껴 살림을 하고, 아이 둘을 키우느라 너무 바빴다. 함께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대신 엄마가 키웠던 식물 이야기를 나눴다. 고무나무 말고는 주위가 깜깜했는데 엄마와 핸드폰으로 식물 사진을 검색하자 조명이 하나씩 켜지며 어둠 속에서 군자란이, 행운목이, 벤자민이 나타났다. 스킨답서스와 아이비, 산세베리아와 스파티필룸도 등장했다. 엄마는 예전에 키웠던 식물을 떠올리며 행복해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집에 고양이까지 바글거려 집안에서 식물을 키울 엄두를 내지 못하는 나는 궁금해졌다. "엄마, 식물을 키우는 마음은 어떤 거야?" 엄마는 처음 받아보는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이내 식물도 생명이기에 항상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며, 화초가 자라나는 모습이 예쁘다고 했다. 지금까지 키운 식물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뭐냐고 묻자 행운목이라도 답했다. "우리 집 행운목이 크게 자랐잖아. 꽃도 피고. 행운목에 꽃이 피면 집에 좋은 일이 생긴다고 그래서 정말 기분이 좋았지." 행운목에 꽃이 폈을 때 집안에 행복한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 그제야 기억났다.

이름은 낯설지만 사진으로 보면 친숙한 식물들과 함께 자랐다고 생각하니 호기심이 생겼다. 집에서 키울 수 있는 식물의 종류가 다양했다. 식물마다 잘 키우는 방법이 따로 있어 공부해야 할 것도 많았다. 신세계였다. 이름에 고무나무가 들어가는 식물도 뱅갈고무나무, 벤자민고무나무, 팬더고무나무, 떡갈잎고무나무, 대만고무나무 등 여러 가지다. 우리 집 크리스마스트리 역할을 했던 나무의 정확한 명칭이 인도고무나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오늘 하루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고 매번 다짐하지만 잠시라도 방심하면 다른 이들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것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최근에 이사가 너무 하고 싶었다. 코로나로 집콕하는 기간이 계속되니 방이 두 개인, 그마저도 하나는 창고로 쓰고 있는 집이 갑갑했다. 식탁 겸 작업용으로 쓰는 테이블 위에 책이 쌓이고, 고양이의 장난감이 발끝마다 차이고, 비좁은 거실을 가로지를 때마다 자꾸 남편의 발이 걸리고…. 불평이 늘어갈수록 유튜브와 SNS에서 봤던 아름다운 풍경이 큰 창에 가득한 넓은 집, 아름다운 빛깔의 목재로 만든 고급스러운 작업실 책상과 척추를 탄탄하게 받쳐줘서 허리 디스크 따위는 생길 틈이 없을 것 같은 고가의 의자가 어른거렸다. 결국은 대청소로 마음을 달래며 이사를 포기하긴 했지만, 한동안 작은 집의 모든 것이 낡고 지저분하고 복잡했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은 월셋집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의 기쁨은 까마득하게 잊고 말이다.

마음의 균형이 깨진 틈에서 갑자기 욕망이 자라나니, 내가 가진 것들의 가치가 작아지고 고작 그것밖에 손에 넣지 못한 능력이 보잘것없게 느껴질 뻔했다. 다행히도 내 안에서 오랜 시간 뿌리를 내린 고무나무가 중심을 잡아주는 계절이 찾아왔다. 추운 저녁,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데 따뜻하고 달콤한 집의 공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 "역시 내 집이 최고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장 이사를 가겠다며 난리를 치던 사람이 맞는지. 다른 것은 그대로인데 겨울이 왔다고 하루아침에 작은 집의 고마움을 쉽게 되찾다니!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풍요롭고 쾌적했으면 하는, 더 나은 생활을 바라는 소망은 열심히 살아가는 힘이 된다. 다만 끝도 없는 비교를 통해 내가 가진 것들을 하찮게 여기거나 내게 없는 것들을 맹목적으로 갈망하고 싶지는 않다. 세상이 선호하는 삶의 조건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조건이 우월하면 더 다양하고 풍성한 이야기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다른 이들의 멋진 인생에 박수를 보내지만 지금은 나이기에 통과할 수 있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각자의 화분에서 피어난 고유하고도 특별한 경험에 집중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창고 방에 숨겨져 있던 크리스마스 장식을 꺼냈다. 알전구 사이에 작은 빨간색 볼이 달린 줄과 발레 공연을 관람하고 산 호두까기 인형이 전부다. 단출하지만 마음속, 어떤 크리스마스트리보다도 최고였던 인도고무나무에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작은 화분 하나 없는 작고 따뜻한 집에 내릴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야겠다. 진작에 어른이 됐으니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누가 알까. 지금 내 손안에 놓인 것들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꿈꾸고 소망한다면 언젠가는 햇빛이 잘 들어오는 넓은 방 한 칸에 따로 작업실을 만들고 그 창가에,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초록의 화분을 나란히 놓는 날이 선물처럼 오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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