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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Jul 24. 2024

다시 누워서 책 읽기

직업을 때려치우고 싶다거나 멀고  곳으로 여행을 떠나길 바란다거나 온종일 그림만 그리고 싶어 어쩔  모르며 여러 갈망에 시달렸던 직장인 시절의 다이어리를 정리하다가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항상 시간에 쫓기던 그때의 내가 가장 바라고 바랬던 일은 책을  없이 읽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책만 읽고 싶다. 책을 많이 읽고 싶다. 읽고 싶은 책들을 몽땅 읽고 싶다. 읽고 싶다, 읽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의 메아리가 몇십 권이나 되는 다이어리의 페이지 곳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이렇게나 간절한 마음이었던가 놀라울 정도. 퇴직하고도 이제 7 , 그동안 내게는 소원을 이룰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정작 과거의 내가 그토록 책을 읽고 싶어 했다는  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전히 책은 좋아하지만 정작 책은  읽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자신의 독서법을 담은 저서에서 책이 재밌으니까 읽는다고 말했다. 하루에 8시간씩 매일   있는 것이 있다면   가지, 일과 독서라고도,  읽는 습관  하나는 시간이 나면 닥치는 대로 읽는 것이라고도 했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독서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없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야 과거의 내가 바로 그랬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어린 시절, 동화책을 혼자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책은  재미였다.  속의 세상은 완벽했기에 나는 잠시도 책과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도 친구의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었고(나를 기다리다 지친 친구는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어도 책을 읽느라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중고등학생 때는 시험을 보고 돌아오면 내일 있을 시험을 대비하는 대신 책을 꺼내 들었고, 수능을 앞두고도 <상실의 시대>만 줄곧 읽어댔다. 전공공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학점이 엉망인 대학생이었지만 도서관만은 열심히 출석해 서고 구석구석을 누비며 마음이 가는 책을 찾아냈다. 어른이 되어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책을  붙들었다. 나의 인생은 책만큼 모험이 가득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아서 책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든  다시 깨어나면 내게 닥친 고난 정도는 감당해  용기가 생겼다. 과거의 나는  시간을 다해 책을 사랑했구나.




지금도 나의 작은 집에는 책이 가득하고 언제든 손만 뻗으면 아직 읽지 않은 흥미로운 새책들이 즐비하다. 온라인 서점의 장바구니에는 현재 102, 백칠십만  치가 넘는 책들이 담겨있다. 이렇듯 읽고 싶은 책이 넘쳐나고 책을 향한 흥미가 여전함에도 나는  책을  읽지 않게 됐을까. 핸드폰을 보느라, 나이가 들어 노안이 오기 시작해서, 집중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라는 이유는 사실  변명이다. 본질적인 원인은 전만큼 책을 편하게 읽지 못하게   있다. 읽기만 하는 사람에서 쓰기도 하는 사람으로 바뀐 지점부터 변화가 생겼다. 책과  사이에 쓰는 사람으로  열심히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가, 독서가 창작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끼어들며 나는  이상 책을 즐기지 못하게 됐다.  마디로 책이 불편해졌다.





예전에 책은 내게 누워서 읽는 것이었다. 눈이 나빠지니 앉아서 책을 읽으라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꿋꿋하게 나는 책을 누워서 읽어왔다. 누워서 그림책을 읽었고 누워서 세계고전문학과 한국근현대 소설을 읽었고 누워서 <로마인 이야기> 읽었고 누워서 <퇴마록> <드래곤 라자>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읽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재밌게 읽는 책을 떠올려보면 대부분 누워서 읽은 것들이다. 가장 최근에 홀딱 빠져서 읽은 <존재의  가지 거짓말> 토요일 오후 온종일 침대에 옆으로 누워 읽었다.


하지만 요즘 나는 대부분의 책에게 매우 정중하다. 다짜고짜 발랑 누워 책을 펼치는  아니라  먼저 똑똑 책장의 문을 두드린 다음 허리를 깊게 구부려 인사한다. 쓰는 사람으로서 나의 포부(작가로 자립하는 ) 밝힌  당신에게서  꿈을 이룰  있는 어떤 단서라도 얻어내고 싶다고 고백하며 아주 예의 바르게 책을 책상 위의 독서대로 모신다. 색색의 볼펜과 노트를 펼쳐놓고는 페이지    장을 진지하게 넘기며 줄을 긋고 메모를 한다. 그런 식으로 세심하게 책을 읽으면 기억에 남는 독서가  확률이 높다. 하지만 매번 정중한 과정을 거쳐 똑바로 앉아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독서의 시작을 방해했다. 독서가 놀이와 휴식의 자격을 잃은  심심하면 책에 손을 뻗는 대신 핸드폰을 손에 쥐고 침대에 눕기 시작했다.




무엇을 숭배한다면, 그것을 온전히 즐기기 어렵습니다. 책이란 정말 대단해, 하면서 우러러본다면 책 읽기를 어떻게 즐길 수 있을 까요?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위즈덤하우스,2022)


독서라는 행위에 부여한 무거운 의미 가운데 재미만 남기고 모두  몰아내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 나는 다시 누워서 책을 읽어야 한다. 과거의 영광을 다시 불러낼 누워서  읽기의  번째 책은 스티븐 킹의 <별도 없는 한밤에>.  중편소설집의  번째 소설은 무섭고 잔인하고 슬퍼서 읽으며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지만 며칠  침대에 누워 읽은  번째 소설은 별로 무섭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주아주 재밌었다. 핸드폰으로 끝없이 스크롤을 내리며 허비했을 시간에 나는 소설  편을 읽으며 다른 세상의 다른 내가 되어볼  있었다.


다시 누워서 읽은 책들의 목록을 쌓아가면 나는 어떻게 달라질까? 언젠가 누워서 읽은 책들로 독립출판을 한번 해볼까. 세상에!  독서에 효용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려 하다니.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그냥 읽자, 심심하니까 지루하니까 그냥 재미를 위해.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다 졸리면 스르르 잠에 빠지는 거다. 꿈속에서도  속의 세계를 떠돌다가 깨어나 주섬주섬 다시 책을 펼치고 그러다 점점 빠져드는 재미에 정신이 맑아지는  즐거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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