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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Jul 10. 2024

게으름뱅이들의 천국

멀고 먼 어딘가 찾기 힘든 곳에 게으른 사람들의 나라가 있다고 했다. 집은 빵과 과자와 고기로 지어지고 샘은 포도주와 샴페인으로 넘치는, 나무에는 갓 구운 빵이 열리고 그 아래는 우유가 시내가 되어 흐르는 나라의 이름은 슈라라펜란트. 그곳에서는 굶거나 삶아진 물고기들이 냇가를 헤엄치고 구워진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치즈가 돌멩이처럼 굴러다닌다. 숲과 들판에는 예쁜 옷들이 열리고 나무를 흔들면 돈이 떨어져 사람들은 일할 필요가 없는 곳. 어린 시절 나는 동화책에서 읽은 이 게으름뱅이들의 천국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지인과 대화를 하던 중 나를 게으른 완벽주의자라고 표현한다는 것이 말이 잘못 나와 ‘완벽한 게으름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바탕 웃고 나서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주 오래 하기 싫다는 마음과 싸워왔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를 하는 일은 꾸준히 귀찮고 틈만 나면 눕고 싶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일은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 같이 힘들었다. 일정이 빡빡한 하루를 앞두고서는 걱정이 먼저 앞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반면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는 일만큼은 얼마나 쉽던지. 어쩌면 나는 게으름뱅이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천성은 게으르지만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삶은 웃기고 애달프다. 학창 시절, 숙제를 미리 하는 법이 없던 나는 특히 미술숙제처럼 번거로운 과제가 있는 날이면 하기 싫어서 미루고 미루다 수업 당일 새벽에 일어나 그림을 그렸다.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 괴로워하면서. 인생에 부과되는 의무와 책임 덕분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남들이 사는 모양새를 흉내 내며 살아올 수 있었지만 게으르지 않은 사람들, 혹은 자기 안의 게으름을 큰 어려움 없이 제어하는 사람들을 곁눈질하며 부러워했다. 해야 할 일을 바로바로 해치우며 사는 삶은 얼마나 가뿐할까, 상상해 보지만 평생 그렇게 살아보지 않은 나는 그 가뿐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국처럼 근면성실이 기본덕목이자 많은 일을 이뤄내는 삶이 바람직한 이곳에서는 나 같은 게으름뱅이들은 언제나 일종의 죄의식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이 게으르다고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도 피곤한데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들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지런하다. 정시에 출근해서 일을 하고 퇴근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조기출근에 야근에 자기 계발에 심지어 부업까지 하는 사람들. 동네 산책길에는 해가 뜨기도 전부터 운동하는 이들이 바글거리고,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바쁜 나라. 그 틈에서 혼자만 게으르면 나만 저 끝쪽으로 밀려날 것 같잖아. 내 삶에 미안하잖아.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하며 내 안의 게으름뱅이와 싸우며 살아왔지만 가끔씩 불평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 같이 조금만 덜 부지런해지면 좋을 텐데. 나는 한국이 아니라 슈라라펜란트에서 태어났어야 했어.





직장을 그만두고 인생의 샛길로 샌 후 나만의 리듬을 찾으려 노력했다. 열정 가득 열심히도 살아보고 슬럼프가 와서 한없이 늘어지기도 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강제 없이 자유롭게 살아보니 알겠다. 부지런할 때는 인생이 재밌고 게으르면 지루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산다는 건 끝없는 노동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귀찮아도 움직여야 한다. 그게 살아있는 존재의 본질이다. 결정적으로 중년에 접어드니 게으름으로 낭비할 시간 자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여전히 내 안에는 게으름뱅이가 살고 있다. 아직도 ‘미리’ 뭔가를 하는 일이 없다. 브런치스토리 요일연재 마감이 끝나면 다음에는 꼭 여유 있게 작업해서 연재당일 아침에 글을 올려야지 다짐하지만 항상 하루가 끝나기 직전에 간당간당하게 올리고 마는 것이다. 오늘처럼. 대신 나는 내 안의 게으름뱅이와 무조건 싸우는 대신 그것을 살살 꼬드긴다. 게으름뱅이도 내 꼬드김에 전보다 쉽게 넘어온다. 컨디션이 저하되거나 우울하면 그것이 날뛰기 좋으니 항상 기분을 좋게 만들고 생활의 리듬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혹시라도 완벽한 게으름뱅이 모드가 작동되면 자책하기보다는 본연의 나를 즐기려고 한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보면 일상이 지루해져 다시 부지런해지고 싶어 진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내게 적당한 정도의 부지런함을 설정한다.




어딘지 알 수만 있다면 가고 싶었던 슈라라펜란트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일하기 좋아하고 착하며 나쁜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 일도 할 줄 모르고 우쭐대기만 하는 바보가 오히려 고상한 사람이 된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 가장 게으르고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 왕이 된다. 과연 슈라라펜란트에서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그곳은 과연 망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제는 알 것 같다. 게으름뱅이를 위한 천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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