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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Jul 03. 2024

이것도 인연이라고

그들은 머위에 숨어 우리 집으로 왔다. 퇴근한 남편이 주말마다 양평에서 농사를 짓는 지인에게 받았다며 머위를 건넸다. 무농약으로 키운 거라고, 데쳐서 고기를 싸 먹으면 맛이 좋을 거라는 말과 함께. 머위를 받아 들며 입안 가득 쌈을 싸 먹을 생각에 신이 났지만 마음이 어딘가 불편했다. 봉지에 꽉꽉 담긴 초록색 머위는 지나치게 신선해서 마치 자연을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자연에는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몇 년 전 상추에서 발견한 민달팽이를 키워본 경험이 불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다음날 냉장고에서 머위를 꺼내 솎아 내다가 지름이 0.5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달팽이를 발견하고 나는 기겁했다. 연이어 두 번째 달팽이가 나왔을 때는 히스테리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살아있는 것이 또 내 손안에 들어왔다는 부담 때문이었다. 함께 살고 있는 나이 든 고양이들이 돌아가면서 아파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때였다. 살아있는 것들을 돌보는 일에 지쳐있던 내게는 저울에 올려도 무게가 측정될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달팽이 두 마리가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야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어린 명주달팽이들은 너무 작아 이 정도 크기라면 벼룩파리나 좀벌레를 죽이듯 별 죄책감 없이 그들을 없앨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며 쓰레기통이나 베란다 밖으로 던져버리든가. 어쩌면 지금이 기회였다. 시간이 흐르면 아무리 하찮은 이별이라도 간단하지가 않아진다. 고작 3주를 키운 작은 민달팽이 초록이를 방생할 때도 얼마나 난리법석을 떨었는가.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나 됐을까, 양평에서 남편의 사무실을 거쳐 우리 집에 이르기까지 혹독한 여정을 겪어낸 후 냉장고에서 하루를 머문 이 조그만 녀석들이 비실거렸다. 그래, 며칠간 상추를 먹이면서 데리고 있다가 기운을 차리면 풀이 우거진 곳에 놓아주자.





아직 번식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지만 혹시라도 자웅동체인 달팽이들이 2세를 만들어낼까 작은 플라스틱통을 각각 따로 마련했다. 통에 촉촉하게 물을 뿌린 후 무농약 적상추를 한 장씩 깔고 그 위에 달팽이를 올려놓았다. 탈출방지를 위해(아주 중요하다) 싱크대 거름망을 통 위에 덮어 씌었다. 이렇게 하루에 한두 번씩 통을 씻고 상추만 새로 급여하면 끝!인 줄 알았지. 이름을 짓지 말걸 그랬다. 무명의 달팽이들로 그냥 놔둘 걸 그랬어. 이름을 지으면 마음을 줄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처음 발견한 달팽이를 '달', 두 번째 발견한 달팽이를 '팽'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의 유난이 시작됐다.


시든 상추는 먹이기 싫어 계속해서 신선한 야채를 사들였다. 남은 야채는 인간의 몫이 되었다. 이왕이면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어 여러 가지 야채를 돌아가며 급여해보기도 했다. 잎이 부드러운 버터헤드 상추에 달팽이가 커다란 구멍을 냈을 때는 내가 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달팽이가 배추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는 새벽배송으로 알배추를 구입했다. 배추 이파리의 여린 부분에 달팽이들이 아주 큰 구멍을 만들었을 때는 경사라도 난 듯 들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야채가게에 들락거리는 일이 귀찮아 투덜거리면서도 살아있는 것을 먹이는 일은 왜 이리 기쁠까. 급기야 달팽이의 패각형성에 좋다는 난각 가루까지 구입했다. 달팽이들은 계란껍데기 가루를 먹고 하얀 똥을 쌌다.




하지만 생명을 돌보는 일에는 조마조마함이 도사린다. 아직 껍질이 단단하지 않은 달팽이들을 새 야채로 옮길 때마다 자칫 손에 세게 힘이 들어갈까 신경이 곤두섰다. 실수로 달팽이를 플라스틱 통 바닥에 떨어트렸을 때도, 고양이가 갑자기 달팽이를 향해 주먹을 날렸을 때도 가슴이 철렁했다. 잘 먹고 똥도 많이 싸고 활동적인 팽이와 달리 미동도 없이 잠만 자는 달이가 죽은 줄 알고 몇 번이나 놀랐던지. 펫로스를 겪은 후부터 나는 정이 든 어떤 생명과도 죽음으로 헤어지는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 대상이 손톱 크기도 되지 않은 달팽이일지라도. 역시 이 작디작은 달팽이들은 내겐 너무 무겁다. 얼른 방생해야지.




3주만 데리고 있자고 결심하고 3주 하고 4일이 되는 날, 나는 남편과 함께 달팽이들을 차에 태우고 예전에 민달팽이를 풀어줬던 장소로 향했다. 소독이나 제초의 염려가 없는 풀이 무성한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달이와 팽이 사진을 찍었다. 처음보다 정말 많이 자랐다. 그동안 따로 키우다가 오늘 처음 한 통에 넣었는데 둘 다 더듬이를 길게 빼고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귀여웠다. 달팽이를 꺼내다가 남편에게 말했다. “안 될 것 같아. 다시 집에 데려가야겠어." 하지만 그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버터헤드 이파리에 두 마리를 같이 올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풀숲 안쪽으로 넣어주는데(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달팽이는 비 오는 날 풀어주는 게 좋다고 한다)  팽이는 황급하게 몸을 늘리며 이파리를 횡단하고 달이도 뭔가 상황의 변화를 눈치챈 듯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나를 기쁨과 걱정으로 옭아맸던 작은 것들이 점점 풀밭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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