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끝나고 진짜 여름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그 사이, 우리에게는 6월이 있다. 길가 화단에는 향이 짙은 페튜니아가 즐비하고 살구나무에서는 잘 익은 살구가 뚝뚝 떨어진다. 낮이 길어 세상은 온통 환하고 기온은 점점 올라가지만 아직 무덥지는 않은, 이 밝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달을 보내면서 다가올 더위를 준비한다. 그런데 올해, 6월이 이상해졌다. 고온다습한 기후를 좋아하는 모기의 첫 출현시기가 2020년에는 5월 1일이었는데 올해는 4월 1일로 5년 사이 한 달이나 빨라졌다는 뉴스를 봤을 때 짐작했어야 했나. 아직 6월이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더위가 닥쳤다. 하필 신경 쓸 일이 있어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날들이었다. 간신히 잠에 들었다가도 새벽이 되면 몸이 끈적거리고 공기가 답답해 저절로 눈이 떠졌다. 동쪽으로 난 베란다창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지만 해가 올라오면 이내 뜨거운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집안을 달궜다. 수면이 부족한 데다 갑작스러운 온도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땡볕에 야외활동까지 한 날, 나는 더위를 먹었다.
기운이 없고 밥만 먹으면 졸음이 쏟아졌다. 머리가 멍하고 의욕이 없었다. 여름의 급습으로 맥을 놓은 후 다급하게 여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복용하다 잠시 소홀했던 영양제도 다시 챙기고, 체력소모가 심한 시기이니만큼 운동을 우선순위에 올렸다. 가벼운 양산을 새로 샀다. 하다못해 동네 마트를 가더라도 꼭 선글라스를 끼고 양산을 사용해 햇빛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로 했다. 집에 있으면 늘어지기 쉬우니 오전에는 카페나 스터디 카페로 출근하기로 다짐했다. 새로운 계절에 필요한 새로운 리듬을 설정했다.
무방비상태로 맞은 여름의 매콤한 맛에 놀란 가슴은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분명 자귀나무에 분홍색 꽃이 하늘거리고 모감주나무에 노랗고 자잘한 꽃이 불꽃처럼 피기 시작한 6월이 분명한데 최고 기온 35도의 폭염에 길을 걷고 있자니 내 감각이 현재를 한여름이라고 인식했다. 그나마 지금은 습도가 낮아서 뜨겁기만 하지 이제 장마가 시작되고 습도마저 높아지는 진짜 여름이 되면 뜨거운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폐를 데울 것이다. 안 그래도 한겨울에 태어난 겨울인간이라 어릴 적부터 여름을 견디는데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는데 6월이 이 정도라면 앞으로 다가올 한여름을 어떻게 버텨야 한단 말인가. 여름이 무서워졌다. 하지만 다가올 계절을 두려움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최근 몇 년간 스스로 했던 여러 약속 중에서도 나는 모든 계절을 사랑하기로 한 결심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충실히 지켜왔다. 내게 모든 계절을 사랑하는 것은 인생을 사랑하는 일과도 일상을 제대로 살아내는 일과도 맞닿아있었다.
아파트 화단을 뒹구는 살구를 볼 때마다 먹고 싶었지만 게으름을 부리다가 하지가 지나서야 살구를 사러 갔다. 동네에서 제일 큰 마트를 갔는데 살구가 없어 대신 복숭아를 샀다. 초록마을에 갔는데 여기에도 살구는 보이지 않았다. 살구가 언제 나오냐고 물으니 살구는 이제 나오지 않는다고. 아쉬운 마음에 대신 자두를 산 후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고 집 근처 과일가게에 들렀다. “혹시 살구 있나요?” 두근두근. “네~ 살구 있지요. 정말 맛있어요.”내 질문에 사장님이 반갑게 화답했다. 살구를 사러 갔다가 졸지에 여름과일을 한가득 안고 집에 돌아왔다. 복숭아도 자두도 맛있었지만 삼고초려 끝에 맛본 살구는 사장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건살구를 먹을 때 나는 농축된 새콤달콤함이 생과육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살면서 먹은 살구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맛이었다. “아, 진짜 맛있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나는 혼잣말을 하며 여름의 맛을 즐겼다. 가을과 겨울과 봄을 보내며 잊어버린 즐거움이었다.
지난여름에 쓴 글을 뒤졌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여름 안에서 나는 배롱나무꽃과 맥문동과 해당화를 보며 행복해하고 수영을 다녀오면서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난 여름하늘을 감상하고 무지개를 올려다보며 탄성을 질렀다. 복숭아와 옥수수를 열심히 먹고 미숫가루에 꿀과 얼음을 듬뿍 넣어 마셨다. 정말 더운 날에는 수박을 먹으며 무서운 드라마를 봤다. 기운이 빠져 땅에 누워있는 매미를 풀숲으로 옮겨주는 일도 빼먹지 않았다. 요즘 열렬하게 여름과 열애 중이라며 여름을 향한 애정을 고백하고 또 고백했다. 한여름이 끝난 직후부터는, 아직 여름이 한참 남았는데도 이 계절이 끝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여름은 마치 놀이동산 같아서 마음이 들뜨고 신난다고, 덥고 습해 몸이 처지긴 해도 세상이 다 같이 복작이는 느낌이라 나 또한 고독해질 필요가 없어 좋다고 적었다.
사라져 버렸던 6월이 요 며칠사이 다시 돌아왔다. 한낮에도 햇빛 아래를 걷는 일이 괴롭지 않았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공기는 쾌적했다. 살구나무가 열매를 다 떨궈가는 동안 아파트 화단에 참나리가 꽃대를 길게 올리고 진한 주홍색 꽃을 피웠다. 그 옆 작달막한 봉선화와 도라지에도 귀엽게 꽃이 달렸다. 6월이 며칠 남지 않았지만 더 이상 다가올 계절이 두렵지 않다. 세상은 곧 온통 여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