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모델

by 여지나


고등학교 때였나. 선생님은 우리에게 롤모델을 적어보라고 하셨다.


좋아하는 연예인은 있었지만 닮고 싶은 람은 없었다. 친구들을 보니 주로 가족이나 위인, 유명인을 꼽았다. 나도 칸을 채우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누가 내게 묻는다면 여전히 대답할 수 없다. 이유는 달라졌다.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힘든 시간을 만날 때마다 온전히 기댈 곳이 없었다. 주저앉을 여유는 없었기에 먼저 그 길을 간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주로 책이나 강연을 통해 배웠는데 세상엔 별의별 길을 찾거나 만드는 사람이 많았다. 혼자라고 생각했던 길 위엔 이미 구덩이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 수백 킬로는 앞서 걷고 있는 사람, 가끔은 뒤통수가 보일 정도로 근처에 있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진로, 결혼, 육아, 트라우마, 인간관계... 내 눈엔 멋지고 대단하게만 보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결점을 고백했다. 그러고도 그들은 받아들이거나 나아지거나 했다.


내 롤모델들의 역사는 어느 누구도 평탄하지만은 않다. 그들에게 은연중에 배운 것들이 쌓이자 어느새 내 다리에도 힘이 붙었다. 개천에서 났든 하늘에서 났든 사람은 늘 행복하고 자신감에 차 있을 수는 없는 건데. 그들을 보면 내 쪽만 유난히 어둡다며 칭얼거렸나 싶다.


그들도 나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고, 병에 걸리기도 했다. 잘못된 선택도 있었다. 현실을 거부하거나 도망치다가도 결국엔 천천히 일어섰다. 가지각색으로 걷다 뛰다 하는 사람들의 실체를 알아갈 때마다, 어쩌면 나도 비슷한 색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관관계가 힘들 땐 A책을 들춰보고, 가족에 대해 고민일 땐 B강연을 다시 본다. C가수의 솔직함도 높이 산다. Z까지 있으니 편중될 일도 없고, 무언가에 매달릴 위험도 없다. 고마운 건, 내가 선택한(그들은 모르지만) 그들이 꽤나 솔직하게 고백해 주었다는 것이다. 아팠다고, 포기했었다고, 후회했다고.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다면 칸이 부족할 것 같다. 한 명만 적으라고 하면 꽤 오래 고민해야 정도로 닮고 싶은 사람은 무수히 많다.


예전엔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고 싶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모델이 되려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아마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