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큰아이가 던진 말에 입술을 꼭 깨문다.당시 8살이었던 큰아이는 학교가 파하면 가는 학원마다 동생 손을 잡고 함께 다녔다. 어린 마음에 힘들단 말을 한 번쯤 할 만도 한데 늘 동생이랑 다녀서 좋단다. 그때 막내는 다섯 살이었다.
맞벌이 부부들이 흔히 겪는 고통과 좌절, 포기 그리고 다시 의지를 불태우기를 반복하며 지낸 시간들이 꿈처럼 흘러갔다.
어느 날 데친 시레기 모양 피곤에 절어 퇴근했는데 주방에서 물소리에 섞인 아이들 목소리에 멈칫.
"형아! 형아! 엄마 피곤하시니까 우리가 도와드리자."
"그래 그러자."
뭐가 그렇게 재미가 있는지 연신 까르르 넘어가는 아이들. 키 작은 막내는 식탁의자에 올라 형이 퐁퐁 묻혀 조막손으로 닦은 그릇을 헹군다.그 장면은 긴 시간 동안 잠재의식처럼 스며들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랑하는 내 아이들 행복하게 해 줘야겠다는 일념이 생겼고 여기까지 걷게 했다.
Photo byㅡ별꽃
직장생활 핑계로 아이들에게 소홀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웃집에 두 아이를 맡기면서도 늘 따뜻한 국과 밥, 반찬 간식까지 만들어 올려 보내고 출근하려니 하루 잠자는 시간이 두세 시간, 많게는 네 시간 정도였다. 체중은 점점 줄어 표준체중 이하, 면역력 저하, 깡으로 버티다 두 번이나 기절. 타고난 허약체질인지라 체력은 늘 한계에 부딪히곤 했다.
반추할 사이도 없이 흐르는시간 속에서도 열심히만 살지 말고 무엇이 되어보자 아이들과 했던 약속이 현실이 되었다. 나는 독한 엄마도 극성맞은 엄마도 못되었지만 아이들이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하고 싶다는 것이 생겼을 때 지체 없이 그러라 한 것이 다였고, 조부모님과 아빠의 반대를 중간에서 물리쳐준 게 또 다였던 것 같다. 덕분에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난 수필가로, 큰아이는 일러스트레이터로, 막내는 클레이작가가 되었다.
Photo byㅡ별꽃
서른 초반 어느 날의 인생설계
나와 아이들은 내가 40대가 되었을 때 무얼 하고 있을까 서른 초반의 어느 날, 난 갑작스러운 삶에 무게를 느꼈다. 그 당시만 해도 박봉이었던 공무원 월급으로 과연 아이들의 꿈을 펼칠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생겼다.
고민을 딱 3일 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한 직장에서 25년이란 시간이 흘러 장기근속 포상을 받게 된 것이다.
"장기근속에 대한 소감 한 말씀해주시죠."
"서른 초반 어느날 나와 내 아이들은 내가 40대가 되었을 때 무얼 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등줄기가 서늘했어요. 바로 뛰쳐나왔죠. 그날의 저를 칭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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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와~~ 이게 꿈이야 현실이야. 너무 행복하다. 진짜 고마워."
친구의 진심 어린 말이 가을바람 속으로 흩어진다.
부소산성길에 가을이 쏟아진다. 백마강을 굽어보는 고란사 지붕 위의 낙엽은 만추의 고즈넉함에 빠져있다. '데엥 데엥~뎅그렁' 바람을 타는 풍경소리와 스님의 독경소리에 가을은 깊어간다.
Photo byㅡ별꽃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전설의 낙화암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고란사 선착장에서 황토 돛단배를 타고 백마강 잔물결 위를 달린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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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면은......'
갑판 위에서 맞는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공은 여행자의 모습을 담아주려 애를 쓴다.
꿈꾸는 백마강은 세월의 무게에도 변함없이 백제를 사유한 듯 몽환의 그리움을 잉태한다.
사공이 찍어 준 사진
그리워할 이도 그리워할 것도 없는데 그리움 같은 통증이 일렁이다니. 해실한 늦가을 햇살이 잔물결 위에 보석처럼 부서진다.
같은 직장다른 사무실에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생겼다.아주 가끔 삐걱거리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그저 그러려니한다.
가끔은 무심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다가도서로가 생각나면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와인 한잔하고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친구다.
5년 전 그녀 표현에 의하면 한 개도 아닌 두 개의 선물을 받게 되는데 유방암과 대장암이 그것이었다.
Photo byㅡ별꽃
암세포가 그녀의 몸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고 앙상하게 말라가는 그녀는 눈동자도 풀려버렸다. 다급해진 나는 누룽지를 끓여 갓김치와 함께 들이밀며 얼른 나아서 동유럽 여행을 떠나자는 빈약속을 했었다. 그 말이 힘이 되었는지 밥 한술 못 뜨던 입으로 숭늉 한 그릇을 다 비웠고 치료를 위한 투지를 불태웠다.
항암치료를 받던 중간에 막연하게 했던 빈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지인들의 우려와 달리 11박 13일간의 동유럽 여행을 너무도 행복하게 다녀올 수 있었고, 그녀는 투병생활 5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은 것이다.
Photo byㅡ별꽃
실은 2020년 10월엔 그녀와 나를 위한 선물로 북유럽여행을 약속했지만 코로나로 바뀐 세상에서 기약 없는 짝사랑이 될 것 같아 불쑥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가을 햇살에 속살까지 내비친 구기자 열매의 붉디붉은 모습이 농염하다. 구드레나루길을 걷다 '부르릉' 시동을 건다.
백마강 물결 위에 엇비친 햇살을 업고 낙화암 삼천궁녀의 슬픔을 끌어안은 은빛 출렁임에 급하게 차에서 내린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억새밭 풍경.
입사 25주년의 나에게도 암 완치 판정을 받은 그녀에게도 신은 과분한 선물을 안겨주셨다. 서편하늘로 하루가 기울고 백마강 위를 낮게 날던 이름 모를 새가 억새밭으로 사라질 즈음 두 여자의 얼굴에 남겨진 붉은 가을 햇살 한 조각이 얹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