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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ㅡ별꽃 Sep 16. 2021

트렌치코트와 친구

스벅에서 바라다보이는 거리엔 이미 가을이 안착해 있다. 고막에 밀착된 이팟에서 쏟아지는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에 섞인 백색소음도 계절은 농밀하게 달라붙는다.

친구처럼 내 일상의 밀접한 부분을 차지하는 승용차가 아무래도 아픈 것 같아 서비스센터에  맡겼다. 스벅에서 업무를 두 시간 정도 본 후 지금은 망중한이다.



트렌치코트와 친구


"너 진짜 너무한다. 딱 하루만 입어보고 준다더니  벌써 한 달이 넘었어. 가을 다 지나고 줄거니?"


그녀가 아끼는 스카이 블루 칼라 트렌치코트와 크림색 정장 한 벌을 빌려간 친구는 준다 준다 하면서 가을 끝에 다다를 때까지 돌려줄 생각을 안 한다, 


친구는 그녀가 입고, 신고, 들고 다니는 모든 것에 관심이 많았고, 심지어 월급날과 보너스 타는 날까지 정확히 알고 맡겨둔 것 달라 듯 돈을 빌려갔다. 같이 객지 생활하는 처지고 여유가 없긴 피차일반이었을 텐데, 회사 정문 앞에서 기다리는 친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번번이 옷과 돈을 빌려줬지만, 옷은 번번이 오염되어 못 입게 되거나 형태가 변한 채 어렵사리 돌려받기 일쑤였, 돈은 늘 자투리를 떼어내거나 가끔은 어물쩡 넘어가기도 했다.


그녀에게  끈질기게 이직을 권유하던 회사에 대신 친구를 취직시켜 주었고, 퇴근 후 밤늦게까지 무역업무를 꼬박 3개월을 가르쳐주었다. 초등학교 때 방학과제로 만들기 숙제가 있었는데(오빠가 박카스 병으로 인형을 만들어 줌) 전교에서(전교 라야 6 학급이지만) 최우수상을 받았고 교실 뒤 환경정리란에 크게 쓴 그녀 이름과 최우수상이라 쓴 색종이가 붙게 되었다.


다음날 학교에 등교해서 감쪽같이 친구 이름으로 바뀐 인형을 보고 엉엉 울며 오빠한테 일렀더니, 오빠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한 마디씩 거들었고, 친구는 두 다리를 뻗고 통곡을 했다.


그러면서도 둘은  토닥거리며 잘 지냈고, 친구는 그녀에게 있는 거 없는 거 다 주고 싶어 늘 안달이었다. 친구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고, 둘은 여고 때까지 손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리움을  달랬다. 여고 2학년 때 친구가 시 한 편 써서 보내달라 부탁해 보내줬는데, 친구가 시로 전교에서 최우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친구 일이 내  인 것 같 축하 인사를 전하며 상을 받은 시를 보내보라 했지만 흐지부지 그럭저럭 잊어버렸다.


그녀는 취직이 되었고, 서울에 올라와 서소문에서 친구와 친구의 친구랑 같이 커피를 마시다  최우상을 받았던 시는 그녀가 보낸 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욕심이 없다고 가끔 야단 아닌 야단을 맞았는데 욕심이야 왜 없겠는가. 누구와의 경쟁을 지금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크게 관심도 없는데, 다만 자신이 해내야겠다는 목표를 이루려는 집념? 욕심? 이 강할 뿐이다. 른 사람 의식을 잘 안 해서 무관심하다는 핀잔도 받는다.


그때 시 사건이 들통나고 친구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너는 언니도 있고, 오빠도 있어서 숙제도 도와주었지만 나는 동생만 네 명이야, 그런데다 너는 예*고, 공*도 *하고, 글도 잘 쓰잖아.(어째 주고받은 이야기를 쓰면서도 그녀는 몹시 오글거린다 ㅎ) 내 소원은 너 한번 이겨 보는 거였어."


갑자기 친구에게 무언가 크게 잘못한 것처럼 미안한 마음에 같이 눈시울을 적셨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녀는 친구에게 더 기꺼운 정을 쏟아부었고, 동생도 못 입게 했던 아끼고 아끼던 트렌치코트를 친구에게 빌려주었다. 크림색 정장 한 벌과 하얀색 하이힐, 그리고 까만 가방까지.


돌려받았을 때 구두굽은 다 까졌고, 크림색 정장은 흐물흐물 제 형태를 잃었다. 가장 신경이 쓰였던  스카이 블루 렌치코트는 오염도 심하고 손빨래를 했는지 색은 바랬고 구김도 심해 결국 버려야만 했다.


둘은 한동안 냉랭하게 지내다 그럭저럭 퇴사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늙어가는 중이다. 그러다 그녀는 책을 출간하게 되었고,  친구는 가장 먼저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와인 한 병과 케이크, 그리고 꽃다발을 들고 친구까지 대동해 자기 일인 양 행복해하며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계절마다 흩어진 기억들이 하나씩 다녀갈 때가 있는데 문득 그 시절로 기억은 달려갔다.  

친구는 음식 솜씨가 좋아 자취방에 그녀를 불러 가끔 밥을 지어주었는데, 고추장에 무친  오징어채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땐 그랬다. 옷도, 돈도 빌리고 빌려주며  친밀도를 표현했고,  어른들은 보증 서 주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취방에 모여 외로움을 달랬고 우정을 나누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색이 바래고 흐릿해져 가고 있지만,  스카이 블루 칼라 트렌치코트는 선명하게 이십 대를 떠올리게 한다.




두서없이 끄적이는 동안 거리에 주저앉았던 가을 햇살은 나뭇잎 위로 점핑을 한다. 까만색 커피는 석 잔째 목 넘김을 하고 아이팟에 섞여 들려오는 옆자리 군대 탈영병 잡는 이야기가 조성진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Op 73 '황제'에 삽입된다. 문득 이십 대가 생각났고 트렌치코를 입고 쓸쓸한 가을 거리를 걷고 싶어졌다.

트렌치코트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던 이십 대 추억을 들춰 본 것뿐이다. 정이 많은 친구는 잘살고 있다.


#사진ㅡdaum에서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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