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에 찬 시대와 상관없이 봄은 발치 아래까지 성큼 달려왔다. 만개한 봄꽃들과 잔잔한 파문을 가르며 몰려드는 잉어 떼, 깔깔대는 어린아이들, 달리는 하이킹족, 그 뒤를 쫓는 봄바람, 상큼한 햇살에 절로 걸음은 멈춰지고 천변 벤치엔 해실한 볕을 쬐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시대가 주는 공허함 탓일까. 우한 폐렴은 사회적 거리두기, 집회 금지, 공적 마스크를 구입하기 위해 줄 서기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것들을 변하게 했고 여전히 변하고 있다. 나의 일상도 많이 변했다.
혼자 여행을 떠나고, 혼자 걷고, 혼자 등산을 한다. 고독한 자의 마음엔 뜻하지 않은 풍요로움이 찾아오기도 한다. 사회적 거리가 멀어진 대신 아이들과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다. 한주걸러 카페 구석진 자리를 찾아 향유하던 시간을 잠시 접고 햇살이 종일 머무는 발코니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신다.
유려함으로 치장한 봄이 대지에 내려 않고, 새들의 지저귐이 창공을 차고 오르는 이른 봄날, 도심 속으로 질주하는 텅 빈 전철은 여전히 겨울 끝이다. 내가 탄 칸엔 나를 포함해 고작 두 명. 이 칸을 낯선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평소처럼 일상을 지키는 善한 사람들로 다시 채워지길 바라본다. 차창밖으로 투영되는 한강의 아름다움은 회색빛 차가운 열차의 굉음에 산산이 부서져 흩어진다.
난 요즘 자꾸 냉장고던, 창고던 무얼 채워 넣는 습관이 생겼다. 김장김치가 아직 남았음에도 포기김치를 담그고 열무김치 파김치로 딤채 안을 꼭꼭 채워둔다. 어릴 적 뒤란 창고 큰 오지항아리에 쌀이 그득하고, 땔감이 처마 밑까지 차오르고, 앞마당 화단에 김장독이 묻히고 나면 엄니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그 시절 엄니와 지금의 난 아마도 비슷한 듯 다른 걱정일 게다. 어떤 이는 수천 길 낭떠러지에 걸쳐진 외줄을 장대하나에 의지한 채 걷는 어릿광대의 숨 막히는 위태로움을 보는 듯하고, 어떤 이는 설마라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외줄을 흔들기도 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사치처럼 여겨지는 건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무덤덤한 현실 속 허상처럼 느껴짐은 왜일까. 설마와 확실한 두려움과 변치 않는 한결같은 정의와 무관심과 비겁함과 조작과 위선과 거짓과 사악한 질병이 그 어느 때보다 도드라지게 나타나고 혼란을 야기하는 시대이다.
"거짓은 정의를 이길 수 없단다 아가야." 눈가엔 주름이 지고 허리는 다소 구부정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한분이 손주를 무릎에 앉혀놓고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당당함으로 세월을 지켜온 할머니 눈동자는 빛이 난다.
느닷없이 회오리바람이 불며 연분홍 꽃잎이 봄바람을 타고 눈부신 햇살 가운데로 블랙홀처럼 빠르게 쏟아져 들어간다. 이내 하늘에선 수억만 마리의 하얀 나비와 연분홍 꽃잎이 나풀나풀 대지위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천변을 걷는 사람들은 빙글빙글 춤을 추며 두 손을 치켜들고 꽃비를 맞는다. 아이들은 나비를 잡으러 뛰어다닌다.
헤드셋으로 들려오는 꽃의 왈츠를 들으며 천천히 햇살 한가운데를 걸어야겠다. 이봄을 마음껏 향유(享有)하며 벚꽃엔딩을 보고픈 소박함을 간직할 테다. 아름다운 우리의 봄은 그렇게 다시 시작될 것이고 그대들의 봄날은 안녕한지 안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