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라는 사람이 일어일문학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
이 글은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소설화해서 만들어봤습니다.
이 이야기도 누군가에게 큰 영감을 주는 글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릴 적, 나는 대구광역시 서구라는 지역에서 자랐다. 나의 가족은 참 특이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작은 철물점 가게를 운영하는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흔한 주부였다. 참 안타깝게도 내가 태어나면서 우리 집은 점점 몰락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초졸이었고, 다른 사람을 쉽게 시기질투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일의 그릇"이 참 작은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사업을 하고 있음에도 사업을 하고 있는 지를 몰랐다. 다른 사람이 어음으로 물건을 구입했다면, 그 대금을 받아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술을 먹고 잊어버렸다. 아버지가 그런 행동을 했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 상처 주거나 받기 싫어서가 아니었을까 한다.
당연히 아버지의 사업은 망할 수밖에 없었고, 집안의 분위기는 점점 흉흉해졌다. 아버지가 매일 지인과 술을 먹고 집에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 뒤처리는 어머니와 나를 비롯해서 형들이 다 해야만 했다. 어느 날,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아버지가 있는 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몰랐지만, 고등학교 때 도박장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때가 2005년, 내 나이 5살일 무렵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망했고, 빚은 엄청나게 많았다. 그럼에도 몇 년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할아버지는 농촌에서 어느 정도 자수성가를 한 사람으로 농협에서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가지고 있던 자산도 많았고, 아버지가 결혼할 때는 집을 한 채 현금으로 선물해 주었다. 하지만 몇 년간의 빚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결국은 할아버지도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된다. 우리 아버지만 문제였다면 상관없었을 텐데, 다른 형제들도 말썽을 일으킨다. 그럴 법도 한 게, 할아버지는 자식 교육보다 돈을 우선시했다. 아버지 보고 초등학교 졸업 이후, 바로 일을 하라고 시켰고 다른 가족들도 비슷했다. 대졸자로 충분히 만들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할아버지가 돈만을 바라보고, 자식 교육을 포기했기에 일어난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거기에 내가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넘치는 빚을 감당할 수 없었던 탓에 우리 집에는 일명 "빨간딱지"가 붙게 된다. 다시 말해, 자산을 압류당한 것이다. 이 당시에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집에 이상한 딱지가 붙더니, 집을 이사하게 되었다. 이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슬프고 힘든 감정보다 두근거렸다. '새로운 장소로 이사를 한다니 과연 어디일까?' 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두근거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환상은 현실 앞에서 잔인하게 부서지고 만다.
새로 이사 온 집은 2008년 기준으로 보증금 없이 월세 20만 원만 주면 살 수 있는 집이었다. 30평에 방이 5개였던 우리 집은 사라지고, 다 낡아빠진 허름한 집에 살게 된다. 집에 샤워기 같은 건 없고, 호스로 물이 나오는 집이었다. 심지어 화장실은 집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청소와 씻는 물을 아끼기 위해서 쌀뜨물을 이용하거나, 화장실 변기에 물을 채워 넣은 생수통을 넣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불행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하나도 몰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난 애초에 다른 사람이랑 삶을 비교하는 습관이 그다지 없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좋아하는 아이가 생긴다. 그러나 나는 키 140cm에 몸무게는 50kg에 육박하던 비만이었다. 그런 내가 이 아이에게 고백하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당시 나랑 같이 짝을 했던 여자애가 있었다. 그 아이가 나 보고 좀 "씻고 다녀라"라는 말을 하거나 "옷 좀 사 입어라"라는 말을 했다. 그때는 그 아이의 말이 참 상처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물값을 아끼려고 머리만 감고, 샤워는 거의 하지 않았다. 옷은 12살 위의 형의 옷을 계속해서 물려 입었다. 내가 입었던 햇수까지 합치면 옷의 나이가 15살이다. 초등학교 2학년의 상도보다도 나이가 많은 옷이었다. 그러니 옷에는 구멍이 나 있고, 땀이 나면 살이 비쳐 보이기도 했다. 그 정도면 당연히 한 마디하는 게 지금에 와서는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4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때였다. 어머니가 방에서 혼자 훌쩍훌쩍 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알고 보니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후, 재기하는 과정에서 돈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아버지는 몇 년간 자포자기 상태였다가 모든 걸 "사주 탓이다"라고 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인생이 꼬인 이유와 망한 이유를 모두 "사주", 다시 말해 운명이 그랬다는 것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사주에 빠져서 명리학을 익히고, 철학관을 운영한다. 그 운영 과정에서 돈이 없는 탓에 어머니와 싸우고, 결국 어머니가 울고 만 것이다. 정말 충격이었다. 돈이 없어서 사랑하는 엄마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아마 이때부터였던 거 같다. 나는 내 꿈보다 돈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나의 무의식 중에 돈이 최고의 가치에 올라갔다.
나는 내 가족을 참 싫어하는데, 가족 중에서 누구도 배울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반면교사는 있었기에 그것도 나름의 경험이라곤 생각한다. 작은 형은 돈이 없어 슬퍼하는 어머니를 보고 용돈을 돌라고 졸랐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한심했다. 형이 하던 말 중에서 "돈이 없어도 연애할 수 있다"라고 해놓고, 자신은 항상 어머니에게 용돈을 돌라면서 징징대는 모습을 보면 참 한심했다. 결국 자신이 하는 행동이 말과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를 화나게 했던 건, 어머니에게 "거지 같은 집에 태어나게 할 거면 날 왜 태어나게 했어"와 같은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때, 진심으로 가족의 연을 끊고 싶었다. 이 사람이 나의 형제라는 사실이 참 부끄러웠다. 같은 형제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나에겐 큰 모독이었다.
어쨌든 아버지는 초졸에 막장인생이었고, 작은 형은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큰 형이 본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 사람도 보고 배울 사람이 없었기에 참 힘든 삶을 살게 된다. 20대에는 가족의 생계를 거의 책임지게 되고, 나의 교육비를 모두 책임진다. 형은 고등학교 시절 운동화 하나로 3년을 보냈다.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 힘든 학교생활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해나갔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가고서는 바로 일을 시작한다. 그 일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와 교육비를 책임졌다. 사실상 나의 아버지는 우리 형이었던 것이다. 형은 학생의 역할과 가장의 역할을 동시에 하면서 참 많이 고생했다.
이런 현실이었기에 모든 애들이 다 가는 학원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냥 가끔씩 어머니가 용돈을 주면, 그 돈으로 문방구 옆에 있는 분식을 사 먹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그러다 돈이 없어서였을까. 내 외모가 문제였을까. 환경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었을까.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게 된다. 이때 나는 "일본 애니"로 도피하게 된다. 내 현실을 모두 버리고 그냥 망상과 공상 속에서 살며, 나를 지켰다. 누군가가 보면 약하다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의 아무것도 없던 나에겐 "나만의 공상 세계" 밖에 답이 없었다.
"나만의 공상 세계"에 빠지고 나서는 행복감이 엄청나게 올라간다. 현실과 이상세계 모두 개판이었지만, 이상세계만이라도 완벽했으니까 말이다. 내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꼭 말하는 것 중 하나가 친구들과 "유희왕 카드 게임"을 했던 때다. 그 게임을 할 때는 다른 아이들보다 내가 항상 최고였고, 그 속에서는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게임을 지던 이기던 항상 즐거웠다.
중학교 시절부터 나는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신체능력과 건강이 참 안 좋은 사람이었다. 운동신경은 정말 1도 없었고, 군대에 입영할 때 받는 신체검사에서는 5급 판정이 하나, 4급 판정이 하나 있었다. 이 당시에는 큰 병은 없었지만, 잔병과 운동신경이 최악이라 몸으로 돈을 버는 건 절대 못하리라 예상했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로 다짐한다.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 찾아가서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나는 전교 19등까지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한 번 그 순위를 찍고서 맛탱이가 간다. "에이 대충 해도 그 정도 유지하면 돼.", "어차피 명문 사립 갈 돈도 우리 집은 없으니까 그냥 공립 갈 정도로만 유지하자" 정말 이 마인드를 가지고 딱 그 정도만 공부했다. 그리고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이 내 머릿속을 맴돈다.
지금 공부를 해도 딱히 돈 적으로 이득이 없는데?
내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는 게, 부모님의 삶에 조금의 기여도 되지 않았다. 돈과 별 관련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때 나는 "학교 공부를 하는 게 참 부질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당시 했던 사고 중에서 "대학을 가는 게 손해다"라는 것도 있었다. 빠르게 취직해서 대기업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받는 삶이 나에게 있어서 베스트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마이스터고에 입학해서 대기업 공장에 들어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제1 투자자인 형의 단호한 반대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에서의 공부는 더더욱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배우는 쓸데없는 것들을 공부할 빠에 지금 나오는 "돈 버는 지식"이 알고 싶었다. 이 당시가 2017년이었는데, 유튜브가 핫했다. 그래서 학교공부를 대충 반 10등(3등급) 정도만 할 수준으로 맞춰놓고,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다. 게임 유튜브를 시작했는데 당시 컴퓨터가 30만 원짜리였다. 이 컴퓨터로는 게임 방송을 할 수가 없어서, 큰맘 먹고 영끌해서 70만 원짜리 컴퓨터를 구입한다. 약 1년 정도 행복하게 방송을 할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고정 팬은 만들 수 있었지만 장비와 환경 문제로 결국 방송을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된다. 5년 전 올렸던 영상은 화질이 480p에다가 영상도 조잡한데 조회수가 7천이나 되었다. 너무나 기뻤고, 계속하고 싶었지만 대학과 이사 문제로 결국 방송을 그만두게 된다.
대학에 입학할 때는 "일어일문학과"에 들어갔다. 우선, 내 성격상 싫어하는 건 죽도록 안 하는 성격이다. 그 탓에 입시도 수능을 보지 않는 전형으로 갔다. 면접과 나의 학교 활동을 본 후 면접을 통해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부 종합 전형"을 선택했다. 나는 그 당시 가장 흥미 있고 좋아했던 일본문학을 내 전공으로 골랐다. 어차피 문과로 대학을 나온다면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대학 중 가장 높은 곳을 골랐다.
그리고 입학한 "일어일문학과"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