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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fragrant lulu Feb 15. 2024

때가 되면 꽃은 피는 법

feat. 커피 로스팅

커피콩을 꺼낸다. 24년 1월 24일 로스티드. 볶은 지 3주가 지난 콩이다. 봉투를 연다. 으으으음. 오늘이 제일 고소한 향을 내는데...

올 겨울 가장 추운 날 아침에 산 콩이다. 그날은 장갑을 끼고도 손가락 사이로 얼음이 송송 박혔다.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익숙한 냄새가 났다. 콩 볶는 냄새였다. 지금 로스팅을 마치고 콩이 쏴아 소리를 내며 우르르 기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냄새를 따라 걸음을 걸었다.

몇 년째 한 곳을 지키고 있는 로스터리 카페. 카페라고 말하기에는 어쭙잖다. 1층은 로스팅 작업실이고, 2층은 카페를 겸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1층에서 간이 의자 서너 개를 두고 커피를 서빙했었다. 어쩔 수 없이 테이크아웃만 가능했다. 그것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난 확장을 한 것이다.

그곳은 로스팅만 전문으로 하고 원두를 납품한다. 병원이나 기업체 같은 기관에 대량으로 원두를 거래하는데, 소규모로 손님들에게 몇 가지 메뉴만을 정해진 시간에 짧게 판매한다. 20대 초반의 직원 세 명이 종일 로스팅 작업을 하느라고 분주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커피를 많이 찾는 점심시간에만 반짝 카페를 연다.

몇 년 전, 처음 호기심에 들렀던 그곳에서 바디감이 좋은 카페라테를 마시며 짧은 얘기를 나눴다. 당시에 커피는 중강배전으로 다크 로스팅에 가까웠다. 에스프레소 머신에 적합한 커피를 볶았다. 처음 산 원두는 만족했었다. 대중적인 입맛에 맞았다. 고소하고 진한 향미가 아메리카노와 라테로 내리면 좋을 맛이었다. 두 번째로 샀던 원두는 실망스러웠다. 당일 로스팅해서 신선한 것이라 믿고 구입했는데 날짜가 오래된 것을 내주었다. 원두는 까맸다. 쓰고 탄맛이 강해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직원들은 이제 20대 중반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이번에 산 원두는 가장 향미가 좋았다. 로스팅 냄새가 너무 좋아서 왔으니 지금 방금 볶은 것을 달라고 했다. 로스팅을 바로 끝낸 원두는 쿨링할 시간이 필요한데, 나의 계산은 날도 추우니 오는 도중에 식히려고 했다. 직원은 오늘 볶은 것이라며 이미 봉투에 담긴 원두를 건넸다. 당일의 날짜가 찍힌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고맙게 가져왔다. 남자는 작은 창문으로 나를 응대하느라고 장갑도 안 끼고 맨손으로 원두를 포장하고 카드를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직원의 정성이 들어가서일까, 세월에 연륜이 깃들어서일까, 원두는 고소하고 무게감이 좋았다. 워시드와 내추럴한 콩이 적절히 섞였다. 중남미 원두 세 가지를 블렌딩해서 중배전으로 볶았다. 이전보다 살짝 로스팅 강도가 내려간 것 같았다. 초콜릿의 쌉싸름한 쓴맛과 누룽지를 그을린 듯한 탄맛이 조금 나지만 후미에 단맛이 이어져서 드립에도 괜찮았다.

커피는 보통 로스팅을 하면 3일 차에 가장 맛이 좋다. 1주일 이내에 소진하는 것이 최적의 로스팅 원두 사용법이다. 그런데 이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날짜 계산법이고. 사실 원두의 맛이 가장 좋은 때에는 정답이 없다. 신선하다고 최고는 아니다. 나의 경험상 어떤 원두는 한 달이 되었는데도 깊은 풍미를 내는 것이 있었고, 심지어는 세 달이 되었는데도 신기하리만치 맛이 살아있던 원두도 있었다.

오늘 내린 커피는 3주가 지났지만 그 기간 중에서 가장 숙성된 향미를 내고 있다. 고소한 견과류가 주를 이루고, 어딘가 향긋한 산미가 군데군데 나오고, 뒤에는 흑설탕이 적당하게 남는다. 밸런스가 고루 갖춰진 안정감을 준다.

얼마 전에 그림을 그렸었다. 꽃을 그려 보려고 했는데 가운데 세 송이만 그리고 나니 더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안 예쁘고 뭘 그릴지 몰라서 손을 뗐다. 몇 주가 지나고 다시 그림을 보았다. 마음 가는 대로 그려 보자는 생각에 컬러를 집었다. 이번에는 완성을 했다. 무제의 그림이 되었지만, 이 종이에는 이 그림이 가장 완성되고 어울려 보였다.

인생은 언제 어떻게 최적의 꽃을 피울지 모른다. 혹시 지금 꽃몽우리가 안 맺혔다면 조금 기다리자. 언제 터질지 모르지만 꽃은 그때에 가장 아름답게 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