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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Sep 30. 2020

망할 놈의 학자금 대출

지긋지긋했던 14,565,900

매년 연말이 되면 나라에서 '너, 빚쟁이, 신고'하고 문자를 보낸다. 취업 후 학자금 상환 제도로 대출을 받은 이들이 해야 하는 정기 채무자 신고다. 때문에 연말이면 자연스레 대학교에 다니면서 얼마나 빚을 졌는지 확인하게 된다. 평소에는 까먹고 있었더라도, 채무자 신고를 하는 날에는 비로소 내가 빚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전까지 나는 14,565,900원의 빚을 진 채무자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매달 대출 이자를 넷플릭스 월 구독료처럼 납부할 뿐이다.


25살부터 약 1,500 만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이십 대보다 삼십 대가 된 지금에서야 더 크게 다가온다. 1,500만 원은 대충 계산해봐도 대기업 대졸 신입 평균 초봉의 1/3 수준에 달하는 금액이다. 상태 좋은 중고 소나타 한 대를 살 수 있는 가격이기도 하고, 조금 더 보태면 원룸 월세 보증금 정도도 낼 수 있는 금액이다.


이상하게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는 주변에서 학자금 대출을 받은 친구들이 없었다. 어쩌면 내게만 얘기를 안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뉴스나 신문기사를 통해 많이 접한 탓에 학자금 대출이 보편적인 일인 줄 알았는데 적어도 내 주변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보통 아버지 회사에서 등록금이 나오거나, 빚을 내지 않더라도 그 정도 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곤 했다. 가끔은 대출을 받지 않고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통해 등록금을 납부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물론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웠고, 이것을 가난이라 포장하며 연민을 구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옆 집과 우리 집이 불에 타고 있는데 우리 집이 조금 덜 타고 있다고 해서 다행인 것은 아니므로, 나는 대출을 받지 않고 대학을 다닌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 그게 상당한 복이라는 걸 사회에 나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최근 드디어 나를 은근하게 신경 쓰이게 만들던 학자금의 늪에서 벗어났다. 국가 공인 빚쟁이 신분을 탈피한 것이다. 부모님의 손을 조금 빌리기는 했으나, 1,500만 원가량의 학자금 대출을 다 갚았다. 지긋지긋한 시간이었다. 대출을 상환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났다. 정해진 계좌로 정해진 돈을 송금했고, 별다른 안내 사항이랄 것도 없이 나의 채무는 끝이 났다. 요란한 축하 파티 정도는 있어야 할 것만 같았는데 좀 시시했다. 감상에 빠지지도 않았다. 단지 매월 말마다 오던 학자금 대출 이자 문자를 이제 더는 받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 조금 어색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시원할 뿐이고 섭섭하진 않지만. 개 xx.


학자금 대출은 눈치도 없이 내 기분이 좋든 엿같은 상관없이 언제나 늘 그 자리를 지키며 꿋꿋이 통장을 갉아먹었다. 심지어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마치 자기가 산타의 선물이라도 되는 것 마냥 이자를 강탈해갔다. 이체 날짜가 그 근처였으니 한국장학재단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내가 짜증 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배운 게 거의 없다고 느끼는 탓에 몇 천만 원씩 내면서 연세대학교 학사라는 타이틀을 굳이 딸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그것마저 없었으면 내가 내세울 게 더 없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지금은 그곳에서 만난 좋은 인연들을 얻은 비용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대출금을 갚고 나서는 감상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아주 차갑게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뒤늦게 자본의 관점에서 대학생활을 돌이켜보게 됐다는 말이다. 같은 학생 신분이 아니었다면 내가 살면서 결코 알게 되거나 친분이 생기지 않았을 부류의 친구들이 학교에는 종종 있었다. 내 삶에서 그 정도의 자본가들을 동등한 위치에서 만날 일이 더는 없으리라는 것을, 사회생활을 하자마자 얼마 안 되어서 바로 깨달았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학자금 1,500만 원 보다 더 큰 갭이 있었다.

심심하면 먹는 오마카세와 서울의 집 한 채, 내킬 때마다 해외로 떠나는 가족여행이 내게는 일생의 이벤트일 정도로 다른 세상의 얘기라면, 누군가에게는 학자금을 내기 위해 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이 다른 세상의 얘기일 수도 있겠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다른 학교는 모르겠지만 연세대에 돈 많은 집 자식들이 많다는 루머 아닌 루머는 건 괜한 소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2007년에 엄마는 내 합격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돈 많은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기죽을 것을 걱정했다(그다음은 '데모'나가지 말라는 소리였는데, 이것 못 지켰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다행히도 군대를 다녀오고 나니 국가장학금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었던 덕분에 나는 등록금 걱정을 한시름 덜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돈 때문에 잘 나가지 못했고, 후배들 술 한잔을 사주지 못해 속상해하던 이십 대 초반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사실 그거 뭐 별 거 아니었는데. 하긴 돈 없어서 술을 그 정도만 마셨으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하루하루 내 인생이 나를 향해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는 건 무엇 하나 쉬운 게 없고, 내가 너무 나태하게 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뇐다. 자려고 잠자리에 누우면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이 나의 밤을 방해한다. 어린 시절의 큰 짐이었던 빚을 갚았으나 이제는 1,500만 원 정도의 빚은 빚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그게 더 무섭다. 빚을 갚았어도 별로 기쁘지가 않다.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1,500만 원의 빚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을 수준으로 빚이 늘어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람들은 집구석에서 외로워져만 간다는데, 나는 그 사실이 낯설지가 않다. 요즘의 내 삶은 늘 그런 식이 었다. 내게도 어엿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날과, 평범하고 안온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날들이 있을까에 대한 생각만 늘어나는 요즘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인생 선배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일들이다. 내 인생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 요즘이다. 쓰고나니 너무 우울한 글이다. 망할 놈의 학자금 대출. 다 그 놈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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