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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Jul 26. 2019

죽고 싶으나
죽을 수는 없는 마음

*글의 내용이 그리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닐 수 있으니, 훈계하실 분이라면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누르는 것을 추천합니다.

"죽고 싶다"


누구나 한 번쯤 입 밖으로 내뱉어 본 말이지만, 말처럼 진짜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드물다. 예의 저 관용구는 "이 고통이 너무 버거워 끊어버리고 싶은데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죽는 것 밖에 없을 것 같을 정도로 괴롭다."정도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죽고 싶은 마음을 말하는 이들은 오히려 건강하다고도 볼 수 있는데, 감정을 표출한다는 것은 그만큼 생에 대한 의지가 아직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투정을 부릴 때 부모나 옆에 봐줄 누군가가 없으면 울지 않는다. 아이들의 울음이란 자기 자신의 감정상태를 알아달라는 일종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우울 역시 마찬가지다. 우울감을 드러낸다는 것은, 지금의 내 상태를 알아봐 달라는 뜻이다. 인간의 감정이란 봐주는 상대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법이다. 세상에 '절대'자살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없다. 단지 겉으로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람은 SNS로든 전화로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우울함을 호소하는 이들 보다는,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마음의 우울감이 심화되어 "죽고 싶다"는 마음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도 종종 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중단하기로 마음먹는 것은, 생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더 생생하고 지옥이기 때문에 내리는 마음의 결단이다. 그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종류의 일들이 그러하듯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 역시도 엄청난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 역시 감정의 기복이 매우 큰 사람이다. 심각하지는 않지만 내 마음과 정신이 견딜 수 없이 힘들 때면 감기로 병원을 찾듯이 정신과를 가면서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기도 한다. *마음의 병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무척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갖은 이유로 인해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는 했다. 짧게 말하자면 용기가 없는 사람인데, 나는 그런 이유로 매번 죽고 싶은 마음을 단념하고는 한다.


*'마음의 병'은 사실 부적절한 표현이다. 우울증은 세로토닌과 멜라토닌 등 수많은 호르몬의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질환에 가깝다.

나는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상상부터(실제로 내 방 창문틀에 올라가고 나서야 그만둘 수 있었다), 지하철에 뛰어내리는 상상(지하철이 들어오는 방향 쪽으로 가야 속도가 빠를 테니 더 확실하게 죽을 수 있겠지?), 8차선 도로의 달리는 차에 뛰어드는 상상(운전기사에게는 미안할 뿐이다), 약물을 과다 복용하는 일(그런데, 수면제를 먹고 그냥 푹 잠들었다 깨어나면 어쩌지?), 손목의 동맥을 칼로 그어 욕조에서 천천히 죽는 법(동맥을 끊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고, 천천히 죽는 일은 너무 끔찍하다. 빠르게, 고통은 최대한 적어야 한다)등 다양한 종류의 자살방법을 상상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런 상상들은 결국 머리로만 생각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위에서 말했듯이 자살을 상상하면 그 뒤에 따라붙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자꾸만 내 실천과 결단에 딴지를 걸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이렇게나 힘들다.


죽고 난 뒤에 내 시신은 최대한 덜 볼썽사나웠으면 좋겠다는 생각 역시 나를 방해했다. 목을 매는 것은 온몸의 노폐물이 다 빠져나와 추하고 냄새나는 몰골이 된다고 하니 안되고, 지하철이나 달리는 자동차에 뛰어내리는 일은 운전자에게 미안할뿐더러 죽는 마당에까지 사회에 도움은 못 줄 지언정 폐나 끼칠 수 있으니 이것도 패스,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일은 확실하고 덜 충격적이겠지만 두개골이 부서지며 빠져나온 내 골수와 처참히 망가진 몸뚱이를 볼 가족들이 걱정되므로 이것도 안될 일이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들로 자살하는 방법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오히려 마음가짐이 조금 바뀌었는데, '죽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의 의지를 다졌다'는 식의 결론은 아니다. 그랬다면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후로 피치 못할 사고로 죽는 일을 상상했다. 가장 좋은 죽음은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약간의 허무함을 안은 채 탑승한 비행기가 추락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해야 하는 고통도 줄어들고, 그런 사고라면 운명이려니 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비행기 추락 사고는 그리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고, 나는 아쉽게도(?) 매번 여행에서 번번이 살아 돌아왔다. 물론, 이런 일을 꿈꾼다는 게 내가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리 중엔 이런 생각도 있다는 말일뿐이다.

죽고 싶으나 죽을 수 없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말이 너무 길어졌다. 죽고 싶으나 죽을 수 없는 마음, 그 마음의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내 죽음 뒤에 남겨질 이들이 걱정되고, 이미 누군가를 자살로 떠나보낸 사람들의 마음에 또 한 번의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고, 죽으면서까지 추한 내 몸뚱이를 보이고 싶지 않고, 사회에 가능하면 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뭐 그런 마음들. 그런 마음들을 기억한 채 생의 의지를 되살리라는 식의 교훈적인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차피 늘 죽음의 그림자가 쫓아다니는 인간의 생이라면, 죽음에 대해 다양한 방면으로 생각하는 삶의 방식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한때는 서른 살까지 사는 의미를 찾지 못하면 죽을 거라고 말하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열다섯이었다. 그렇다. 중2병이었다. 열다섯 살의 윤정욱은 자신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서른을 넘어까지 꾸역꾸역 살아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때문에 나는 서른 살 이후의 삶은 일종의 덤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사실 나는 늘 죽고 싶다. 그렇지만 위에서 나열한 다양하고도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죽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살고 있다. 내게 인생은 늘 고통이고,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 채로 겪는 인생이라는 고통의 사슬을 끊고 싶은 충동을 매 시간 느낀다.


요즘은 새로운 꿈이 생겼다. 적당한 나이에 스위스로 가 안락사하고 싶다는 꿈이다. 돈을 많이 벌고 난 뒤 유럽을 흥청망청 여행한 뒤 마지막으로 스위스에 도착해 잠자는 듯이 이 세상을 뜰 수 있다면, 그건 내 인생의 마지막 여행으로 퍽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철없는 생각. 가끔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면, 그래도 인생에서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는 있겠구나 싶어 기분이 조금 좋아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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