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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Jan 13. 2020

슬픔을 말할 수 없는 슬픔

나는 대체로 행복했던 적이 없다.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행복하다고도 말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늘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나, <렛 미 인>의 이엘리, <위쳐>의 게롤트처럼 어딘지 우울한 기운을 풍기는 영화나 게임 속 캐릭터에 매료되곤 했다. 한없이 밝기만 한 '기쁨'이, 디즈니 속 공주님들처럼 대책 없이 긍정적인 기운을 내뿜는 캐릭터들에게는 매력이 전혀 없었다. 사랑하기는커녕 오히려 짜증만 불러일으키기 일수였다. "참나, 왜 저렇게 대책 없이 밝은 건데?" 그건 내가 사회에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서도 똑같았다. 참나, 왜 이렇게 밝은 건데? 뭐가 그렇게 행복해? 하, 씨발 너 진짜로 행복한 건 맞아?


그러나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를 통틀어 전 세계에서 자신 있게 내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행복의 감정은 인생 전체에서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만 느껴질 뿐이고, 슬픔과 우울의 감정은 끊임없이 개인을 괴롭힌다. 누군가 우리 인생의 구성성분을 분석한다면 분명 97% 이상의 괴로움과 슬픔, 분노와 좌절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그러나 현대인들은 SNS에 자신의 행복한 순간만을 올리며 기억을 편집한다. 호텔에서 호화롭게 여유를 누리는 순간, 유럽의 어느 멋진 도시에서 인생을 즐기고 있는 모습,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술을 마시는 순간. 그런 개인들의 SNS 계정을 보면 행복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게 진짜 인생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대체로 인생은 그렇게 잘 짜인 드라마나 영화 속 각본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아니,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적당히 고난과 역경이 갈등을 유발하며 우리의 흥미와 긴장감을 유발한다. 오로지 행복과 기쁨으로만 가득 찬 이야기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에게 그런 인생이 존재할 수 없듯이 말이다.


SNS가 잘 편집된 '행복 전시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참신한 주장이 아니다. 그건 이미 SNS가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오기 시작하던 얘기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 같은 '행복 전시'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만 나머지, 누구나 행복할 수 있으며 행복을 쉽게 쟁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따라서 우울감을 드러내는 것은 이 시대의 또 다른 죄악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누군가 SNS에서 '힘들다'라는 한마디를 올리기만 해도 사람들은 마치 불행이 전염병이라도 되는 듯이 기피한다. 피하기만 하면 다행일텐데, 더 악질적인 이들은 거기서 다시 한번 자신의 행복을 확인 받고 과시하려 한다. '힘내', '내가 옆에 있잖아'따위의 마음에도 없는 댓글을 무의미한 표정으로 타이핑 하면서 자위한다. 이런 현상을 두고 대린 맥마흔은 이미 2006년에 자신의 저서 <행복의 역사(Happiness: A History)>를 통해 "행복하지 않은 불행(I call it the unhappiness of not being happy)"이라고 말했다. 이게 얼마나 말 같지도 않은 웃긴 상황인가.


결국 행복해지기 위한 우리들의 '행복 전시'는 서로를  점점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인스타그램의 스크롤을 내리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장소에 가며, 근사한 애인을 둔 친구들의 사진과 동영상을 게걸스럽게 탐한다. 나와 상대를 비교하는 건 이제 이 세계의 디폴트, 기본값이 되었다. 상대방에게 연락하지 않아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게 되어 관계는 점점 더 피상적으로만 머무르게 되었다. 행복해지려는 우리들의 노력은 모순적이게도 불행을 향한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되어버렸다.


행복. 좋은 단어다. 인생의 목표로 추구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통을 잊게 해주는 모르핀이 마약의 한 종류이듯 행복이라는 단어를 남용해 고통을 회피하다 보면 거기에 중독되어 더 불행해지고 더 큰 자극과 행복을 찾게 된다. 내가 억지로 행복해지려고 행복이라는 단어를 주입할수록 나중에 더 큰 불행이 내게 닥쳐왔듯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나와 우리의 우울을 적어 내려가려고 한다. 매일 적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겠으나 생각이 날 때마다, 우울감이 나를 잡아먹으려 할 때마다 내 우울과 슬픔의 기록들을 이곳에 새기려 한다.


이건 오늘 아침 여덟 시까지 잠에 들지 못한 채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 백번 고쳐먹으면서 떠올린 주제였다. 처음에는 '죽지 못한 자의 죽음 일기'라는 콘셉트를 떠올렸다. '이 글이 아직 올라오고 있다면 나는 죽음에 실패한 것이고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라는 콘셉트이었는데, 중2병 같아서 집어치웠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너무도, 슬픔에 대해 우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왜 SNS에선 아무도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까? 심지어는 카톡으로도, 전화로도 우리는 왜 슬픔과 우울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인색해졌지?라는 생각을 하던 나는 우리가 행복을 전시하는 데에 익숙해진 나머지 불행을 드러내는 방법을 까먹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내 슬픔과 우울의 병적인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을 가끔씩 풀어내려고 한다. 얼마나 오래 쓰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진지하고 무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오늘 죽고 싶었는데 한강 물이 너무 차가워 보여서 차마 뛰어들지 못했다, 라든지 창문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으나 입고 있는 옷이 깔깔이라 죽기 전에 옷은 챙겨 입어야지 하는 어이없는 이유들과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뭐 그런 이야기들이 될 것 같다.


혹시나 우울과 슬픔을 공유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제가 별 도움을 드리지는 않겠지만 신상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여기에서 글로 함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연은 cherryligh1129@gmail.com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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